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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31. 2024

마음에 들지 않는 옷들과의 전쟁



운동할 때를 제외하면 외출할 일이 별로 많지 않은 가택 생활자인지라 옷에 대해 대단히 무심한 편이었는데, 근래에 들어 등산 용품을 자꾸 사들이다 보니 곁다리로 마음에 드는 일상복도 종종 충동구매하게 되었다. 물론 중고로. 나의 어리석음을 변호하고자 부연하자면, 충동 구매와 중고 제품은 한 세트로 다니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의 상품이 마지막 재고 하나라서 언제 팔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단 하나뿐인 할인 상품.’ 이걸 무시하고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나처럼 사고 팔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이라면 여차하면 팔면 된다는 생각에 더욱 심한 충동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옷장을 비롯한 수납 공간이 거의 꽉 차고 말았다. 물론 옷이라는 게 억지로 꾹꾹 눌러 넣으면 부피가 좀 줄어들어 한계치를 좀 넘길 수도 있으므로 당장 옷을 땅바닥에 던져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가 오진 않았지만, 며칠 전에는 그런 억지 수납을 견디지 못한 침대 서랍이 분해되고 말았다. 나 원 참, 뭐 이런 주인처럼 나약한 서랍이 있나. 하지만 불평해봤자 수납 공간이 살아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투덜대면서 서랍을 재조립하고 보강한 뒤에 의류 정리에 나서게 되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중고 의류를 종종 샀다지만 이렇게까지 공간이 부족할 수 있나? 항상 돈이 없다고 훌쩍거리면서 수납 공간은 이다지도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옷장을 비롯해서 각종 수납 공간을 살펴보니 그 이유는 제법 간단히 드러났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왜 또 많을까? 이 이유는 가풍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가족 중에서 세 명이 재봉틀을 돌리든 바느질을 하든 당연하다는 듯이 옷을 고쳐 입는 사람들이라 옷을 도통 버리질 않는데, 그러면서 모두가 할인할 때 옷을 안 사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직접 산 옷 말고도 부모님이 사온옷(주로 3종 세트), 가족에게 물려받은 옷을 대충 보존하고 있었으니 10년 20년은 된 옷이 옷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의 선택과 무관한 옷이 많으니 마음에 드는 옷이 도통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다. 심지어 내가 마음에 든다고 산 옷이라도 유행과 취향과 체형의 변화에 따라 손이 가지 않게 되기도 하니 오죽하겠는가.


수많은 미니멀리즘 강좌에서 얘기하듯이 내가 쓰지도 않는 물건을 쌓아두자고 공간을 지속적으로 지불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하여 몇 주 전부터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일단 부피가 큰 패딩을 세 벌 처리했다.


한 벌은 물려받은 보머 재킷 모양 패딩인데 내가 절대 입지 않는 스타일인데다 여유가 없는 사이즈고, 게다가 크기에 비해 너무 무거웠다. 패딩 겉감 재질이 비닐같지 않고 멋스럽거나 튼튼해 보이면 터무니없이 무거워지기 쉬우니, 이게 바로 그 예시였다. 이 물건은 직거래로 팔아치웠다. 구매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옷을 사갔다. 대단히 조용하고 순탄한 거래였다.


다른 한 벌은 재작년에 중고로 잘 샀다고 책에도 자랑스럽게 써놓은 패딩이었다. 민망하게도 두 세 번 밖에 입지 못했는데, 그 이유란 터무니없게도 예쁘고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이건 다음에 좀 잘 입을 필요가 있을 때 입어야지…… 생각하고 아꼈더니 입을 기회가 도통 오지 않았다. 하기야 출퇴근도 안 하는 작자에게 영하 10도 정도의 지독한 추위와 즐거운 모임이 겹치는 날이 많을 턱이 있나. 나의 생활 방식에 맞지 않는 오버스펙이었다. 게다가 등산과 자전거처럼 활동적인 취미에 맛을 들였더니 두껍고 무거운 외투를 꺼리게 되기도 해서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처분했다. 그런데 어쩐지 한 해가 지나는 사이에 다들 패딩을 충분히 장만한 것인지 중고로 산 값의 반밖에 받지 못했다. 살 때 고민한 시간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손해다. 이래서 특히 부피가 큰 물건은 없어도 되면 안 사는 게 현명하다.


마지막 한 벌은 패딩 조끼였다. 모직풍의 패브릭 재질로 된 패딩이 멋있어 보이기에 빈티지샵에서 할인가에 산 물건이다. 그런데 사고 보니 아뿔싸, 위에 적었듯이 겉감 무게도 상당했고 폴리에스터 충전재도 제법 무거웠다. 게다가 플리스 같은 옷 위에 패딩 조끼만 입어도 될 만한 날씨를 도무지 포착할 수가 없었고, 오른쪽 어깨를 다친 뒤로 찬바람이 솔솔 새어들어올 때마다 시린 증상이 생겨서 이런 패션은 사치스러운 짓이 되고 말았다. 그간 크롭티를 보면 비만하지 않은 허리를 보유한 자의 특권이라 생각했고 컨버스를 보면 건강한 발을 보유한 자의 특권이라 생각했으며 무릎이 드러나는 옷은 시리지 않은 무릎을 보유한 자의 특권이라 들었는데, 뜻밖에 패딩 조끼도 건강을 자격으로 요구하는 옷이었던 것이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이렇게 선택권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과정인가 생각하면 불경처럼 서럽다.


이 패딩 조끼는 팔아 치우는 과정도 씁쓸했다. 장터에 올린 뒤 처음 문의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사이즈를 한참 묻더니 내 집에서 상당히 먼 병원으로 갖다줄 수 없겠냐고 했다. 입원중이라 병원복 위에 입고 싶다는 것이다. 나도 병원에 심부름을 제법 많이 다닌 터라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해주고는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현실은 다른 일이다. 지도를 보고 따져 보니 자전거를 타고 그 병원까지 배달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작년에 지칠 정도로 병원들을 오간 터라 병원을 가는 것도 환자를 만나는 것 자체도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패딩 조끼는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환자가 간편히 걸칠 만큼 가볍고 편한 옷은 아니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마음에 드는 옷이 깔끔히 정리된 옷장은 절약하는 습관으로 준비되지 않는다)


패딩을 여러 벌 치우자 옷걸이에 다소나마 여유가 생기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지경이기도 했다. 서랍은 여전히 꽉꽉 한가득 들어찬 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랍에 들어 있는 옷을 무작정 꺼내어 옷걸이에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옷걸이는 보통 주름이 가면 안 되는 옷이나 자주 입는 옷을 보관하는 상급 공간이므로, 아무거나 대충 쑤셔넣어도 되는 서랍속의 옷들을 빼서 옷걸이에 거는 행위는 물건에 적합한 제자리를 정해준다는 수납의 중심 교리를 거스르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랍에서도 옷을 꺼내어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랍과 공간박스도 한참 살펴본 뒤에 절대 입지 않을 옷들을 찾아냈다. 면 트레이닝 바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모두 문제될 부분이라곤 전혀 없었으나, 나는 면 소재 바지가 이리저리 감기는 느낌이 싫어서 편하게 입는 용도로는 폴리에스텔 바지만 입기 때문에 이미 몇 년이나 입지 않았다. 앞으로도 입지 않을 작정이다. 폴리에스텔 바지를 다 빨아서 입을 바지가 없다면 면바지를 입느니 젖은 바지를 드라이어로 말려 입는 쪽을 택하겠다. 그런데 어쩌자고 입지 않을 바지를 굳이 다 처박아놨단 말인가?


공간박스에 이어서 옷걸이도 다시 살펴봤다. 옷걸이에도 입지 않을 옷이 제법 많았다. 언젠가 다시 날씬해질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남겨둔 청바지도 서너벌 되었고, 입지 않는 남방 셔츠와 와이셔츠도 적지 않았다. 사실 엄밀히 따져 보면 다림질이 필요한 옷은 전혀 입지 않으니까 모조리 없애버려야 하겠지만…… 평생 안 입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정장에 필요한 와이셔츠와 특별히 재질이 좋은 옷은 남겨두기로 했다. 한편으로 옷을 잘 골라 입지 못하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체크 무늬 남방과, 과도할 정도로 전투복과 똑같이 생긴 남방은 망설일 것 없이 끌어냈다.


그리하여 입지 않는 옷 열두 벌 가량을 두 번에 걸쳐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그중 한 번은 비가 오는 날이라 걸어서 가야만 했는데,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반쯤 녹아서 길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15분이면 가는 길을 40분 이상 걸려서 비틀대며 걸어가자니 대체 뭐하자고 이런 짓을 하는지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관할이 어디든 수거함에 넣기만 하면 버려지지 않고 재활용은 될 옷들이 아닌가. 굳이 직접 기부를 해서 얻는 거라곤 약간의 세금 혜택과 기부 건수 기록뿐인데, 그게 이렇게 번거롭고 피곤한 과정을 거쳐서 얻을만큼 가치 있단 말인가?


기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더 험난했다. 지름길이랍시고 택한 길이 산기슭을 넘어 오는 길이었고, 눈이 어중간하게 녹아서 마구 미끄러진 탓이다. 나중에는 아예 걷기를 포기하고 보드 타듯이 옆으로 줄줄 미끄러져 내려왔다. 몇 달 내내 뜯어고친 워킹화가 아니라 등산화를 신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넘어지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순 있었다. 그만하면 비전문가가 폐품을 되살린 것 치곤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다 싶기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그럭저럭 수납 공간에 여유가 생긴 덕에 한시바삐 뭘 치우고 없애야 한다는 강박 없이, 애매한 곳을 떠돌던 옷들과 잡동사니를 정리해 넣을 수 있었다. 그 난리법석을 피우며 정리를 한 것치고는 도통 티가 나지 않긴 했지만, 원래 청소와 정리는 아무리 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엉망이던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안 꼴이 당장 남에게 보여도 딱히 부끄러울 지경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제법 큰 수확을 거둔 셈이다. 이것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다.


살면서 하는 노력의 상당 부분이 그렇듯이 끝없이 쌓이는 물건을 치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었다 하는 정리도 대체로 허망해질 때가 많다. 물건을 고치는 일도 할인 상품을 뒤적여보면 어이없고 쓸모 없는 짓거리로 느껴지곤 한다. 쓰지 않는 물건의 새 주인을 찾아주는 노력도 비용과 시간을 생각해보면 비효율의 극치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건은 다시 흐트러질 테고 물건은 새 것이 쌀 때가 많으며, 쓰레기는 아무리 줄여봐야 미국놈들이 마구잡이로 버리는데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럴때면 머리를 비우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굳이 머리를 굴려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건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느니 그냥 좀 나아진 부분이 있다거나 좋은 일을 하긴 했다고 대충 적당히 즐거워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데도 굳이 이렇게 기록을 하거나 기부 횟수를 인정받는 것도 그런 사소한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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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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