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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07. 2024

나를 배려하지 않는 바지 밑단과 우울한 바느질



바지 고르기에 고생이 많은 편이다. 기성복이란 제조사가 ‘이 정도 키면 이 정도 허리와 엉덩이 둘레가 보통이겠지’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양산해 파는 것이니까 그 ‘보통’에서 어긋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가장 잘 맞는 옷을 수선해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 와중에 나는 허리부터 밑으로 도무지 평균과 맞는 부분이 없는 터라 가장 큰 부분에 맞춰 바지를 산 다음 나머지를 줄이는 게 아주 일이다. 내가 바지를 잘 사지 않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상당히 크다. 자본주의 시대에 평균을 벗어난 육체로 살면서 눈곱만큼밖에 돈이 되지 않는 일만 골라서 하는 어리석음을 탓해야지 별 수 있나.


내가 바지를 고를 때 문제가 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리에 비해 엉덩이와 허벅지 둘레가 크고, 키는 작다는 점이다. 원래도 그랬는데 살도 찌고 자전거도 타면서 더 심해졌다. 그런 탓에 별 생각 없이 허리에 맞는 바지를 사면 엉덩이부터 낄 때가 많다. 허리가 아니라 엉덩이에 맞는 바지를 사서 졸라매야 한다. 다만 이 때도 바지에 따라선 허리가 너무 남아 벨트만으로 조이기엔 추해지기도 한다. 이러면 밑단만 줄이는 게 아니라 허리도 줄여야 하는데, 바지라는 게 허리를 줄여놓으면 밑위가 이상해진다든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어리숙해 보이는 경우도 많아서 허리까지 줄여야 하는 바지는 대체로 포기하기 마련이다. 이 처지의 밝은 면을 보자면, 나는 내가 이미 가진 바지를 한층 더 아끼고 사랑하게 만드는 친환경적 체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저번 주에는 과감하게 바지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행에서 찍힌 사진을 보니 약간 슬림한 바지를 입은 꼬락서니가 그렇게 작고 어리석어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커보이려면 약간 슬림한 바지가 좋다는 믿음을 갖고 거의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건 전신 사진 찍힐 일이 별로 없어서 갖게 된 착각이 분명했다. 아마 그런 믿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체형을 잃어버린 탓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이를 보완할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더 긴 바지를 입는 것이었다. 바닥에 끌릴 정도는 아니면서 신발 상단을 약간 가릴 정도로 긴 바지가 과하지 않고 착시를 일으키기 딱 적당한 듯했고, 그러자면 밑단쪽이 벌어진 부츠컷이나 세미 와이드 바지를 택해야 했는데, 내게는 그런 바지라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여름용 카고 바지나 트레이닝 바지가 전부였다. 청바지는 모조리 약간 슬림하고 별로 길지 않은 것뿐이었다. 미어지는 옷장에는 자기 자신의 꼬락서니를 객관적으로 잘 점검할 재주도 점검하고 조언해줄 사람도 갖지 못한 나날의 과오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입어야지 이 친구야’하고 적극적인 조언을 해줄 사람이 왜 내게는 한 명도 없었을까? 약간 원망이 생겨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주변의 옷 잘 입는 사람들은 모두 체형을 커버할 이유가 없거나, 타고난 감각으로 계산 없이 옷을 입는 사람들이라 그런 조언은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옷차림에 대한 충고는 남을 불편하게 만들 확률이 높아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한 꺼내기 힘든 법이다. 병식 없는 사람에게 병원에 가라고 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 사진이 더 많이 찍혔다면 모든 부분이 더 빨리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정기검진을 받거나 가계부를 정리하듯, 혹은 눈물 젖은 정산내역서를 받아보듯 나는 나의 외적인 모습도 종종 올바른 시점으로 대면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힘으로 주어진 틀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세미 와이드 청바지를 주문해서 입어봤는데, 심혈을 기울여 주문했음에도 허리가 너무 남아돌았다. 내 허리가 약간 줄어든 탓인지 옷의 허리가 조임 없이 넓게 나와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대로 입을 수는 없는 옷이었다. 대충 어벙하게 입는 것도 정도가 있으니까. 결국 내 주제에 무슨 옷을 잘 입겠다고 난리 법석인가…… 자조하며 새 바지를 완전히 포기했다가, 내가 사려던 것과 매우 유사한 청바지를 훨씬 싼 값에 발견해서 다시 주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착한 바지는 이번에도 컸다. 허리가 5센티는 남아도는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수선해서 어떻게든 입으려면 입을 수는 있는 차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 체형에 적절해서 맵시가 나는 바지를 사겠다는 욕망으로 출발한 일이니 허리를 줄여 입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시험할 선택지들이 남아있는데 수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었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같은 모델의 미디엄과 스몰 사이즈를 모두 시켜버렸다. 예전에는 인터넷 쇼핑으로 옷 사기에 능숙한 사람들이 애초에 두 사이즈를 시켜 하나를 반품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직접 해보니 여러번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확실한 수를 써서 안전한 방법으로 배송과 반송 한 번씩으로 모험을 끝내는 게 합리적인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직접 매장에 가서 입어보고 사는 게 제일이겠으나, 그렇게 싸게 파는 바지를 찾아서 입어볼 매장을 모르니 어쩌겠는가.


심리적, 공간적, 시간적 난리법석을 3차원으로 굳이 이어간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미디엄 사이즈가 딱 맞았다. 지금 내 신체 사이즈가 오래 이어져 왔으니 앞으로도 심각한 변화는 없으리라 기대할 수 있고, 따라서 허리도 엉덩이도 잘 맞고 일자로 떨어져서 짧은 다리를 적당히 가려주는 이 청바지도 오래 믿고 입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긴 바지를 사자마자 그대로 입을 수 있는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터라 난리법석은 분야를 바꾸어 계속되었다. 나는 마치 자기 돈으로 바지를 처음 사보는 소년처럼 유튜브를 보고 적합한 기장에 대해 학습했다. 그 뒤에는 바지를 입고 방안에서 신발을 신은 채 원격으로 셀카를 찍어가며 옷맵시와 바지 길이 사이의 상관관계를 관찰했다. 참으로 열성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택배 봉투가 굴러다니는 방에서 그 난리를 벌이자니 좀 허탈하고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유행에 너무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기 몸에 잘 맞는 옷을 찾는 방법은 중고등학교 때나, 아니면 늦어도 대학교 때 배워뒀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왜 이렇게 생활과 밀접한 영역은 유튜브로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


아무튼 왼쪽은 원래 길이로 두고 오른쪽은 안으로 접어가며 테스트한 결과, 바짓단을 5센티미터 정도 줄이는 게 가장 합당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선을 안 하면 굽이 높은 신발에 맞추기 괜찮지만 범용성이 너무 떨어졌다. 접기만 해서 그때그때 맞추면 접힌 만큼 경계가 생겨 다리가 길어보이는 착시 효과가 반감되므로 5센티로 영구히 수선해버리는 게 가장 합당했다.


이제 문제는 바짓단을 어떻게 수선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이 분야의 베테랑인 부모님께 맡기기, 그리고 세탁소에 맡기기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일로 부모님 손을 빌리는 게 아무래도 늙은 자식으로서 민망한 감이 들었다. 물건을 이것저것 내 손으로 고친다고 책까지 써서 라디오에도 나간 주제에 바짓단 하나 못 고쳐 가족에게 재봉틀 가동을 부탁하는 건 떳떳하지 않은 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탁소에 가는 것도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바짓단 자가 수선에도 발을 들이기로 작정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이는 섬유 접착제를 이용해 봤다. 접착할 섬유 두 장에 접착제를 잘 바르고 압착해서 다리미로 가열하면 끝난다고 하니 성공만 한다면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터였다. 신발 몇 켤레를 접착제로 수선해 본 나로서는 매력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바지 밑단 수선이 그렇게까지 간단하면 다리미 없는 사람 말고 누가 밑단 수선을 전문가에게 유상으로 맡기겠는가. 접착제를 직접 써보니 일단 도포 자체도 쉽지 않았다. 위아래로 포개어져 이중의 고리 모양이 되어 있는 밑단의 위아래 양쪽에 접착제를 고르게 바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밑단을 다시 제 위치에 맞게 접는 과정에서 접착제가 여기저기 묻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제법 괜찮은 듯했던 접착면은 보름쯤 지나자 벌어지기 시작했다. 세탁도 하지 않았는데 떨어질 정도라니, 세탁 세 번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아마 면이 매끈하지 않고 자잘한 골이 많이 파인 데님의 특성상 접착제를 더 많이 써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작업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두 천을 단단히 고정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확고한 방법인 바느질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직접 실과 바늘을 써서 바느질을 하는 게 상당히 힘들고 지난한 과정임을 나도 잘 아는 터라 여기서도 꼼수를 써보기로 했다. 할인할 때 사놓은 수동 재봉틀을 쓸 기회다 싶기도 했다. 이 물건은 밑실 없이 실 한 가닥을 써서 갈고리로 고리를 만들고 체인 스티치를 만들어가는 장치로, 스테이플러처럼 찍어서 바느질을 마친 뒤에 끝부분만 잘 묶으면 제법 빠르게 바느질을 해줄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하지만 써보니까 이것도 저렴한 가격만큼 문제가 있는 물건이었다. 일단 실을 세팅하는 것도 상당히 불편했고, 처음엔 잘 되는 듯하다 네다섯 바늘 이후에는 실이 술술 풀렸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갈고리 각도가 안 좋은가 싶어 조정해 보니, 이제는 실이 빠지는 대신 끊어졌다. 아마도 천이 너무 두꺼워서 그 사이를 지나는 실이 당겨질 때 마찰력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실을 더 튼튼한 것으로 바꾸거나 왁스를 입혀서 마찰력을 줄여야 할 텐데, 불확실한 가설을 검증하자고 그런 노력을 들이기에는 너무 지쳐서 결국 최종적으로 아주 순수한 손바느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모든 헛수고를 거쳐 택한 방법이 기술 가정 시간에 배운 바느질이라니, 문명 발달은 어째서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바느질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아는 거라곤 홈질과 박음질뿐이라 밑단 수선에는 박음질을 택했다. 두 땀을 전진하고 한 땀을 후진하며 두 장의 천을 단단히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실의 방향이 앞뒤로 계속 바뀌어 고정이 단단하고 실이 뜯어져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실이 원단의 길이보다 2배 이상 사용되고 작업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나같은 비숙련자는 더 오래 걸린다. 게다가 바늘이 양면을 끊임없이 전후로 통과해서 바늘이 드나들 자리를 정확히 잡기도 어렵고, 실이 후진했을 때 뒤에 있던 실과 간섭할 경우도 있으며, 후진과 전진이 잘 보이는 면은 숙련도에 따라 보기 흉해지기 쉽다.


나는 넷플릭스에서 ‘안데스 산맥의 생존자들’을 틀어놓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작업을 이틀에 걸쳐 계속했다. 처음에는 바지 안쪽을 뒷면으로 보이게 하려면 바늘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가고 후진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아 한참 헤맬 지경이었으나, 요령이 생기자 아주 엉망이 되진 않았다. 나는 찌를 때 바지를 보고, 뺄 때 화면을 보았다. 영화 속에선 설산에 추락한 사람들이 이 비참한 짓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도 세탁소에 맡기면 순식간에 깨끗이 해결될 작업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 작태에 무슨 의미가 있나 고민했다. 2보 전진 1보 후퇴를 반복하는 박음질 작업이란 인생과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꼬인 실을 풀면서 내 삶도 노력하면 풀릴 수 있는 것인가, 잘라내고 다시 시작하는 게 편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박음질을 단단하게 하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후퇴의 반복이고 완성품에서 보이는 깨끗한 면의 땀들은 사실 전진의 흔적이 아니라 후퇴의 흔적임을 새삼 확인하며, 누군가는 이 사실로 교훈을 주는 감성 에세이를 이미 썼겠구나 싶기도 했다. ‘깨끗한 바느질의 이면에는 치열한 전진과 후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삶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런 노력의 반복이겠죠. 끊임없이 밀려나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가길 포기하지 않는 자세. 수면 아래에서 쉼없이 발을 놀리는 백조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새해에 추구할 방향이 아닐까요.’ 라는 식으로.


하지만 사실 호수에 떠있는 새들은 원래 뼈가 가볍고 깃털에 기름이 배어 가만히 있어도 뜨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박음질이 아무리 튼튼해도 재봉틀로 오버로크를 치는 것보다는 튼튼하지 않다. 요컨대 손바느질은 훌륭한 교훈이나 전통적 방식의 멋과 얼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이 일을 내 손으로 해결한다는 집착과 능력의 한계 속에서 택한 궁여지책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도합 두 시간에 걸친 바느질을 끝내자 허망감은 한층 심해졌다. 안데스 산맥의 생존자들이 목숨을 구하고도 영웅적 심리에 도취되지 못했듯이, 나도 잘 맞는 바지를 마련하고도 별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를 적합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낭비 없는 삶의 방식이라는 뻔한 사실 정도가 내가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이제 바지를 그만 사든지 세탁소와 친해지든지 재봉틀질을 배우든지 할 작정이다.

나를 배려하지 않는 바지 밑단과 우울한 바느질


바지 고르기에 고생이 많은 편이다. 기성복이란 제조사가 ‘이 정도 키면 이 정도 허리와 엉덩이 둘레가 보통이겠지’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양산해 파는 것이니까 그 ‘보통’에서 어긋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가장 잘 맞는 옷을 수선해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 와중에 나는 허리부터 밑으로 도무지 평균과 맞는 부분이 없는 터라 가장 큰 부분에 맞춰 바지를 산 다음 나머지를 줄이는 게 아주 일이다. 내가 바지를 잘 사지 않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상당히 크다. 자본주의 시대에 평균을 벗어난 육체로 살면서 눈곱만큼밖에 돈이 되지 않는 일만 골라서 하는 어리석음을 탓해야지 별 수 있나.


내가 바지를 고를 때 문제가 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리에 비해 엉덩이와 허벅지 둘레가 크고, 키는 작다는 점이다. 원래도 그랬는데 살도 찌고 자전거도 타면서 더 심해졌다. 그런 탓에 별 생각 없이 허리에 맞는 바지를 사면 엉덩이부터 낄 때가 많다. 허리가 아니라 엉덩이에 맞는 바지를 사서 졸라매야 한다. 다만 이 때도 바지에 따라선 허리가 너무 남아 벨트만으로 조이기엔 추해지기도 한다. 이러면 밑단만 줄이는 게 아니라 허리도 줄여야 하는데, 바지라는 게 허리를 줄여놓으면 밑위가 이상해진다든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어리숙해 보이는 경우도 많아서 허리까지 줄여야 하는 바지는 대체로 포기하기 마련이다. 이 처지의 밝은 면을 보자면, 나는 내가 이미 가진 바지를 한층 더 아끼고 사랑하게 만드는 친환경적 체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저번 주에는 과감하게 바지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행에서 찍힌 사진을 보니 약간 슬림한 바지를 입은 꼬락서니가 그렇게 작고 어리석어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커보이려면 약간 슬림한 바지가 좋다는 믿음을 갖고 거의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건 전신 사진 찍힐 일이 별로 없어서 갖게 된 착각이 분명했다. 아마 그런 믿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체형을 잃어버린 탓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이를 보완할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더 긴 바지를 입는 것이었다. 바닥에 끌릴 정도는 아니면서 신발 상단을 약간 가릴 정도로 긴 바지가 과하지 않고 착시를 일으키기 딱 적당한 듯했고, 그러자면 밑단쪽이 벌어진 부츠컷이나 세미 와이드 바지를 택해야 했는데, 내게는 그런 바지라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여름용 카고 바지나 트레이닝 바지가 전부였다. 청바지는 모조리 약간 슬림하고 별로 길지 않은 것뿐이었다. 미어지는 옷장에는 자기 자신의 꼬락서니를 객관적으로 잘 점검할 재주도 점검하고 조언해줄 사람도 갖지 못한 나날의 과오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입어야지 이 친구야’하고 적극적인 조언을 해줄 사람이 왜 내게는 한 명도 없었을까? 약간 원망이 생겨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주변의 옷 잘 입는 사람들은 모두 체형을 커버할 이유가 없거나, 타고난 감각으로 계산 없이 옷을 입는 사람들이라 그런 조언은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옷차림에 대한 충고는 남을 불편하게 만들 확률이 높아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한 꺼내기 힘든 법이다. 병식 없는 사람에게 병원에 가라고 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 사진이 더 많이 찍혔다면 모든 부분이 더 빨리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정기검진을 받거나 가계부를 정리하듯, 혹은 눈물 젖은 정산내역서를 받아보듯 나는 나의 외적인 모습도 종종 올바른 시점으로 대면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미 와이드 청바지를 주문해서 입어봤는데, 심혈을 기울여 주문했음에도 허리가 너무 남아돌았다. 내 허리가 약간 줄어든 탓인지 옷의 허리가 조임 없이 넓게 나와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대로 입을 수는 없는 옷이었다. 대충 어벙하게 입는 것도 정도가 있으니까. 결국 내 주제에 무슨 옷을 잘 입겠다고 난리 법석인가…… 자조하며 새 바지를 완전히 포기했다가, 내가 사려던 것과 매우 유사한 청바지를 훨씬 싼 값에 발견해서 다시 주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착한 바지는 이번에도 컸다. 허리가 5센티는 남아도는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수선해서 어떻게든 입으려면 입을 수는 있는 차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 체형에 적절해서 맵시가 나는 바지를 사겠다는 욕망으로 출발한 일이니 허리를 줄여 입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시험할 선택지들이 남아있는데 수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었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같은 모델의 미디엄과 스몰 사이즈를 모두 시켜버렸다. 예전에는 인터넷 쇼핑으로 옷 사기에 능숙한 사람들이 애초에 두 사이즈를 시켜 하나를 반품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직접 해보니 여러번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확실한 수를 써서 안전한 방법으로 배송과 반송 한 번씩으로 모험을 끝내는 게 합리적인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직접 매장에 가서 입어보고 사는 게 제일이겠으나, 그렇게 싸게 파는 바지를 찾아서 입어볼 매장을 모르니 어쩌겠는가.


심리적, 공간적, 시간적 난리법석을 3차원으로 굳이 이어간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미디엄 사이즈가 딱 맞았다. 지금 내 신체 사이즈가 오래 이어져 왔으니 앞으로도 심각한 변화는 없으리라 기대할 수 있고, 따라서 허리도 엉덩이도 잘 맞고 일자로 떨어져서 짧은 다리를 적당히 가려주는 이 청바지도 오래 믿고 입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긴 바지를 사자마자 그대로 입을 수 있는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터라 난리법석은 분야를 바꾸어 계속되었다. 나는 마치 자기 돈으로 바지를 처음 사보는 소년처럼 유튜브를 보고 적합한 기장에 대해 학습했다. 그 뒤에는 바지를 입고 방안에서 신발을 신은 채 원격으로 셀카를 찍어가며 옷맵시와 바지 길이 사이의 상관관계를 관찰했다. 참으로 열성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택배 봉투가 굴러다니는 방에서 그 난리를 벌이자니 좀 허탈하고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유행에 너무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기 몸에 잘 맞는 옷을 찾는 방법은 중고등학교 때나, 아니면 늦어도 대학교 때 배워뒀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왜 이렇게 생활과 밀접한 영역은 유튜브로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


아무튼 왼쪽은 원래 길이로 두고 오른쪽은 안으로 접어가며 테스트한 결과, 바짓단을 5센티미터 정도 줄이는 게 가장 합당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선을 안 하면 굽이 높은 신발에 맞추기 괜찮지만 범용성이 너무 떨어졌다. 접기만 해서 그때그때 맞추면 접힌 만큼 경계가 생겨 다리가 길어보이는 착시 효과가 반감되므로 5센티로 영구히 수선해버리는 게 가장 합당했다.


이제 문제는 바짓단을 어떻게 수선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이 분야의 베테랑인 부모님께 맡기기, 그리고 세탁소에 맡기기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일로 부모님 손을 빌리는 게 아무래도 늙은 자식으로서 민망한 감이 들었다. 물건을 이것저것 내 손으로 고친다고 책까지 써서 라디오에도 나간 주제에 바짓단 하나 못 고쳐 가족에게 재봉틀 가동을 부탁하는 건 떳떳하지 않은 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탁소에 가는 것도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바짓단 자가 수선에도 발을 들이기로 작정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이는 섬유 접착제를 이용해 봤다. 접착할 섬유 두 장에 접착제를 잘 바르고 압착해서 다리미로 가열하면 끝난다고 하니 성공만 한다면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터였다. 신발 몇 켤레를 접착제로 수선해 본 나로서는 매력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바지 밑단 수선이 그렇게까지 간단하면 다리미 없는 사람 말고 누가 밑단 수선을 전문가에게 유상으로 맡기겠는가. 접착제를 직접 써보니 일단 도포 자체도 쉽지 않았다. 위아래로 포개어져 이중의 고리 모양이 되어 있는 밑단의 위아래 양쪽에 접착제를 고르게 바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밑단을 다시 제 위치에 맞게 접는 과정에서 접착제가 여기저기 묻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제법 괜찮은 듯했던 접착면은 보름쯤 지나자 벌어지기 시작했다. 세탁도 하지 않았는데 떨어질 정도라니, 세탁 세 번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아마 면이 매끈하지 않고 자잘한 골이 많이 파인 데님의 특성상 접착제를 더 많이 써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작업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두 천을 단단히 고정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확고한 방법인 바느질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직접 실과 바늘을 써서 바느질을 하는 게 상당히 힘들고 지난한 과정임을 나도 잘 아는 터라 여기서도 꼼수를 써보기로 했다. 할인할 때 사놓은 수동 재봉틀을 쓸 기회다 싶기도 했다. 이 물건은 밑실 없이 실 한 가닥을 써서 갈고리로 고리를 만들고 체인 스티치를 만들어가는 장치로, 스테이플러처럼 찍어서 바느질을 마친 뒤에 끝부분만 잘 묶으면 제법 빠르게 바느질을 해줄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하지만 써보니까 이것도 저렴한 가격만큼 문제가 있는 물건이었다. 일단 실을 세팅하는 것도 상당히 불편했고, 처음엔 잘 되는 듯하다 네다섯 바늘 이후에는 실이 술술 풀렸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갈고리 각도가 안 좋은가 싶어 조정해 보니, 이제는 실이 빠지는 대신 끊어졌다. 아마도 천이 너무 두꺼워서 그 사이를 지나는 실이 당겨질 때 마찰력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실을 더 튼튼한 것으로 바꾸거나 왁스를 입혀서 마찰력을 줄여야 할 텐데, 불확실한 가설을 검증하자고 그런 노력을 들이기에는 너무 지쳐서 결국 최종적으로 아주 순수한 손바느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모든 헛수고를 거쳐 택한 방법이 기술 가정 시간에 배운 바느질이라니, 문명 발달은 어째서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바느질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아는 거라곤 홈질과 박음질뿐이라 밑단 수선에는 박음질을 택했다. 두 땀을 전진하고 한 땀을 후진하며 두 장의 천을 단단히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실의 방향이 앞뒤로 계속 바뀌어 고정이 단단하고 실이 뜯어져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실이 원단의 길이보다 2배 이상 사용되고 작업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나같은 비숙련자는 더 오래 걸린다. 게다가 바늘이 양면을 끊임없이 전후로 통과해서 바늘이 드나들 자리를 정확히 잡기도 어렵고, 실이 후진했을 때 뒤에 있던 실과 간섭할 경우도 있으며, 후진과 전진이 잘 보이는 면은 숙련도에 따라 보기 흉해지기 쉽다.


나는 넷플릭스에서 ‘안데스 산맥의 생존자들’을 틀어놓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작업을 이틀에 걸쳐 계속했다. 처음에는 바지 안쪽을 뒷면으로 보이게 하려면 바늘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가고 후진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아 한참 헤맬 지경이었으나, 요령이 생기자 아주 엉망이 되진 않았다. 나는 찌를 때 바지를 보고, 뺄 때 화면을 보았다. 영화 속에선 설산에 추락한 사람들이 이 비참한 짓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도 세탁소에 맡기면 순식간에 깨끗이 해결될 작업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 작태에 무슨 의미가 있나 고민했다. 2보 전진 1보 후퇴를 반복하는 박음질 작업이란 인생과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꼬인 실을 풀면서 내 삶도 노력하면 풀릴 수 있는 것인가, 잘라내고 다시 시작하는 게 편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박음질을 단단하게 하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후퇴의 반복이고 완성품에서 보이는 깨끗한 면의 땀들은 사실 전진의 흔적이 아니라 후퇴의 흔적임을 새삼 확인하며, 누군가는 이 사실로 교훈을 주는 감성 에세이를 이미 썼겠구나 싶기도 했다. ‘깨끗한 바느질의 이면에는 치열한 전진과 후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삶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런 노력의 반복이겠죠. 끊임없이 밀려나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가길 포기하지 않는 자세. 수면 아래에서 쉼없이 발을 놀리는 백조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새해에 추구할 방향이 아닐까요.’ 라는 식으로.


하지만 사실 호수에 떠있는 새들은 원래 뼈가 가볍고 깃털에 기름이 배어 가만히 있어도 뜨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박음질이 아무리 튼튼해도 재봉틀로 오버로크를 치는 것보다는 튼튼하지 않다. 요컨대 손바느질은 훌륭한 교훈이나 전통적 방식의 멋과 얼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이 일을 내 손으로 해결한다는 집착과 능력의 한계 속에서 택한 궁여지책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도합 두 시간에 걸친 바느질을 끝내자 허망감은 한층 심해졌다. 안데스 산맥의 생존자들이 목숨을 구하고도 영웅적 심리에 도취되지 못했듯이, 나도 잘 맞는 바지를 마련하고도 별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를 적합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낭비 없는 삶의 방식이라는 뻔한 사실 정도가 내가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이제 바지를 그만 사든지 세탁소와 친해지든지 재봉틀질을 배우든지 할 작정이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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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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