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an 04. 2024

너무 서툰 영업은 영업이 아니었음을




제법 오랫동안 블로그와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무슨 물건이나 서비스나 작품을 소개하고 독자들의 반응에서 자기 효능감을 충족하는 생활을 한 터라 지금도 좋은 게 있으면 주변에 소개하고 권유하고 영업하기 일쑤다. 내가 본 것은 물론이고 써본 것, 써보지 않은 것, 쓸 수 없는 것도 싸고 좋아 보이면 영업했고, 쇼핑몰에서 점원의 편에 선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농담이자 타인의 행복을 바람으로써 나의 행복의 일부를 구성하는 행동 양식이기도 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나도 다소 의문이 있지만, 나 개인의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두거나 허위 사실을 이용하여 남을 속여먹은 적은 없으니 아주 부정적인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23년 한 해 동안에도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잡다한 물건을 사라고 권유했고 대부분을 실패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애를 쓰고도 사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제법 오래 되어 성능이 떨어지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친구가 둘이나 있어서 근래에 출시된 모델로 변경하길 권했으나 설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물건을 아끼는 게 좋은 일이라고 라디오 전파까지 써서 전국에 방송을 해댄 작자인 만큼 멀쩡한 스마트폰을 자주 바꾸어대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케이스는 변경 권유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한 명은 전세 사기 이슈가 매우 시끄러울 때 이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아이폰을 쓰고 있었던 터라 최소한 한동안이라도 통화 녹음이 가능한 안드로이드 기기를 쓰는 게 그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싶었다. 녹음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사기가 사라질 만큼 한국 사회가 미적지근하지 않으니 관점에 따라선 별반 쓸모없는 짓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블랙박스가 사고를 막을 순 없어도 법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안전장치가 되는 것처럼, 안드로이드를 이용해서 비교적 안전한 영역에서 거래를 하길 바랐다. 덤으로 어떻게도 좋게 봐줄 수 없는 카메라를 탑재한 구형 아이폰으로 몹시 풍화된 기억만을 남기고 나처럼 후회하는 우는 범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 한 명은 약간 오래된 중급 갤럭시 시리즈를 쓰고 있었는데, 이쪽은 순전히 카메라 때문에 기변을 하길 권했다. 빼어난 미의식을 갖고 훌륭한 구도의 사진을 제법 자주 남기는 친구인데 카메라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어둡고 흔들리고 불투명한 결과물을 양산하고 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던 탓이다. 비유하자면 재능있는 운동 선수가 신발이 낡아서 기록을 망치는 꼴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1년 이상, 나름대로 열심히 스마트폰을 바꾸라고 조언하고 잔소리하고 영업을 지속했다. 아이폰을 쓰는 친구에게는 내가 쓰지 않는 모델을 빌려주고 유심 카드만 옮기면 큰 불편은 없을 정도로 세팅까지 진행했고, 중급기를 쓰는 친구에겐 성능 좋은 카메라로 찍은 것과 비교했을 때 사진의 품질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해주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의 대부분이 고난과 더러움의 연속이므로 고작 이런 일을 힘들었다고 말하면 안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이 영업은 힘들었다. 일단 아무도 솔깃해하거나 반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정말로 스마트폰을 팔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게임 결제 할인이나 리워드앱처럼 안드로이드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소개하기도 하고, 모임에서 사진의 대부분을 내가 찍는 것보단 여럿이 좋은 사진을 남기면 좋지 않겠냐고 인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이미 써두었듯이 실패로 끝났다. 이미 긴 기간에 걸쳐서 되지 않을 일임을 체감하고 있었기에 낙담하진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괜한 것에 힘을 들이며 유난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이나 쌓았구나 싶어 씁쓸할 따름이다. 내가 추구할 만하다고 여기고 퍼뜨리려던 가치가 별로 보편적 가치는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추구하라고 권하던 가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 일단 선명한 추억의 보존이라는 가치는 다른 글에서도 종종 주장했듯이 추억 그 자체와 비근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영유아기시절 대부분처럼 기억되지 않는 시간들도 가치 있는 시간임은 틀림없으나, 생생히 기억되는 시간은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의 대부분을 시각 정보에 의존하고, 기록된 시각 정보에 기반하지 않은 기억은 빠르게 왜곡되거나 휘발된다. 삶에서 접하는 어떤 풍경의 감동이 아무리 마음 깊이 새겨진다 해도 풍경 자체는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속 이외의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된다는 말은, 마치 우리가 죽고 나면 영혼도 무덤도 없이 그저 사라질 뿐이라는 말처럼 슬프다.


나는 오랜 연애 이후 시간의 증명으로 남은 것이 고작 사진 두 장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 슬픔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처음 놀러간 계곡에서 구형 아이폰으로 남긴 사진 몇 장이 아주 엉망이라는 사실에 분개하여 화상 기록의 질에 집착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즐거운 시간이 언제 또 돌아올 거라는 보장이 없는 만큼, 마음을 언제든 과거로 보낼 매개가 필요한 탓이다.


나는 여기에 대체로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허나 그건 매우 큰 착각이었다. 선명한 화상 기록에 별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기억력이 빼어날 수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길 바랄 수도, 주변에서 대신해주는 기록이면 충분할 수도, 흘러가는 시간에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혹은 지금의 기록 수준에 충분히 만족해서 수십만 원의 지출과 기기 이전이라는 수고를 감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이유들을 나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순 없지만 이해한다. 혹은 이해하는 시늉을 하기로 했다.


(받지 않는 선물을 줄 방법은 없다. 없던 가치관을 줘서 갖게 만들수도 없다)



통화 녹음으로 얻을 수 있는 안전이라는 가치도 나는 너무 당연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리라 넘겨짚었다. 문서로 남기기 싫은 내용이나 오가는 말이 길어질 내용은 걸핏하면 ‘유선’상으로 안내하는 업체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판국에 통화 녹음 없이 안심하고 살 수는 없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폰만 오래도록 불편 없이 써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정말 중요한 업무 내용은 ‘당연히’ 이메일로 주고받으므로 녹음이 아쉬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양식있는 세상의 일이란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고, 이미 말했듯이 블랙박스가 사고를 막아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블랙박스 없이 잘들 살았듯이, 사람들은 통화녹음 없이 잘들 살 것이다. 써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쓰지 않는 게 좋을 물건을 위해 돈을 들인다는 것은 지난하고, 대단한 여유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이폰 생활에 불편이 없다는 증언들을 듣고, 그리고 부모님이 성가신 자동 통화 녹음 설정 좀 꺼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타인에게 별 가치 없는 일을 받아들이라고 무작정 포교를 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작년말, 나는 스마트폰 초고속 충전이 되지 않아서 충전 회로를 교체받았고, 그러고도 같은 증상이 되살아나서 재점검을 받은 뒤 메인보드 고장이라는 지독한 선고를 받았다. 메인보드 고장은 부분 수리가 불가능하고 교체에는 50만 원 가까이 든다. 더 심한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말에 백업용 스마트폰을 마련해야 했던 나는 빌려줬던 스마트폰을 회수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해를 넘기도록 지속했던 영업을 모두 백지화하고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하기로 했다. 예수나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그 누가 타인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 쓰는 내 스마트폰이 정말 고장나면 다른 스마트폰을 사야할 터라 여러 모델을 비교하고 중고가를 고려하는 중인데…… 삼성이 지난 몇 년간 원가 절감을 한 탓에 내가 충분한 효능감을 느낄 만한 카메라를 탑재했으면서 적당히 저렴한 모델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내가 언제나 진심으로 만족할 만한 화질이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형체 있는 기억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마저 들 지경이다. 중고 거래에도 이골이 난 데다 스마트폰에도 관심이 많은 나도 이렇게 힘든 일을 남에게 권하다니, 영리한 영업자는 늘 팔릴 만한 것을 판다는 사실을 새해에는 잊지 않을 작정이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이전 글을 유튜브와 팟빵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건해의 취미 수필 - YouTube

이건해의 취미 수필 - 팟빵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pEXWM

이전 10화 2023년을 빛낸 소비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