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반나절 내내 핸드메이드 페어를 구경했다. 물론 구경만 한 것은 아니고 쇼핑도 했는데, 그러는 동안 줄곧 자신이 올바르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인지 자문해야 했다. 이렇게 드문 행사에서는 총 소비 상한액을 대략 정해둔 다음, 그 안에서는 마음놓고 노는 것이 가장 심리적 부담을 덜고 충동에 의해 망하지 않으면서 즐거운 방식이라는 게 나의 행사 지론인데, 요즘은 등산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느라 있지도 않은 돈을 마구 퍼다 쓴 탓에 상한액을 정한다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그나마 ‘이것만 사면 된다’고 목표로 정해놓은 거라면 작고 귀여운 새 모양 공예품 정도. 특별히 어딜 장식할 작정은 아니었고, 윙스팬이라고 새가 많이 나오는 보드게임의 선 플레이어 표시용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임 안에도 멀쩡한 표시 타일이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물건을 따로 사느냐고 합리적으로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거기엔 게임을 더 보기 좋게 꾸며서 유저의 흥미를 돋우는 것도 게임 보유자의 무거운 책임 중 하나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먹으나 저렇게 먹으나 입으로 들어가는 건 똑같은 음식을 아름답게 플레이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나의 예상과 달리, 행사장에 들어가자마자 닭 모양 오뚝이를 발견해서 목적을 달성하고 말았다. 기쁜 한편으로 다소 김새는 면이 있었다. 이후로 비교적 마음편히 구경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아무튼 일곱이나 모인 동행자들은 제각각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며 행사를 구경했는데, 어디서 보기 힘든 장신구들이 특히 인기였다. 무엇이든 예쁘게 만들어 귀에 걸면 그것이 바로 귀걸이고 패션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귀걸이들도 있었고, 전통 문양을 멋스럽게 살린 슈슈(스크런치 혹은 곱창밴드)나 댕기, 리본 등등도 돋보였다. 나는 반지 외에는 장신구를 하지 않은지 10년을 훌쩍 넘겨서 장신구에는 전혀 끌리지 않았지만 여성 친구들이 장신구에 눈길을 준다 싶으면 너무 어울린다고, 지금 사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호객을 해댔다.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부스에 있는 사람들이 이쪽에 들어오셔야 할 것 같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 호들갑을 떤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내가 살 수 없는 것을 남이 사게 만드는 데에서 대리만족을 느낄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내가 뭘 먹지 못하는 상황일 때 남이 맛있게 먹는 것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심리, 그러니까 먹방을 성립시키는 심리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지간한 장신구는 내 취향에 맞더라도 내가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가까운 사람이 사게 하는 게 그 물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차선책이기도 했다. 게다가 동행자들과 나는 금전적으로 영향을 줄 이유가 없었던 터라 그들이 돈을 얼마나 쓰거나 말거나 걱정, 혹은 죄책감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 돈을 너무 많이 썼는데 오늘은 밥값 좀 내주면 안되겠냐’는 식의 기대도, 그러는 게 좋겠다는 의무감도 발생하지 않는 말끔한 인간관계가 아니었다면 이런 요상한 즐거움은 누릴 수 없었으리라.
그런 식으로 구경을 하다 신기한 장신구를 많이 파는 부스에서 오토매틱 시계 부품을 가공해서 만든 귀걸이나 오래된 구식 열쇠를 세척해서 만든 목걸이 등을 발견했을 때는 재료와 기술이 탐난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낡은 물건을 꽤 많이 되살리긴 했지만, 아예 용도를 바꿔서 새 물건을 만든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만들어본 거라곤 고작 엉성한 청바지 가방 하나 뿐이었고, 그마저도 너무 엉성해서 다시는 비슷한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좀 솜씨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적절한 재료를 수급해서 깨끗이 세척하고 새 용도에 맞게 가공한다는 건 모든 공정이 난해하고 엄청난 시간을 소모하는 법이라 영영 재도전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런 노력의 결과물을 보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끝없이 많은 물건을 둘러본 끝에 우리 일행은 각자의 전리품을 자랑하고 집에 돌아가서 장식품 등을 적절한 위치에 갖다놓았다. 그중에서 한 명은 쓸 일이 별로 없는 식탁 공간을 할애해서 보를 깔고 크리스마스를 위한 장식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썩 보기에 좋다 싶은 한편으로 내가 잃어버린 여유가 떠올라 씁쓸해졌다.
나도 꼭 한 번 크리스마스 트리를 산 적이 있다. 놀러갈 때 가져가서 기분을 내려고 할인 행사 때 산 것이다. 그러나 너무 커서 갖고 다니는 건 아예 포기했고, 싸구려답게 반짝이가 마구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서 작업자가 손으로 허겁지겁 붙인 티가 풀풀 나는 통에 손질하는 내내 엄청난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이후로 저가에 양산된 모형 트리로 한 철 기분을 내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책장 한 칸을 할애해서 트리와 피규어, 장식품 따위를 모아놓고 보기좋게 꾸며 놓으니 확실히 볼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장식품이 몇 가지 있어도 먼지 털기 귀찮다는 이유로,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꼬락서니가 민망하다는 이유로 방 곳곳에 흩어놓고 쑤셔박아 존재 자체를 잊기 직전이었는데, 이것들을 한데 모아두고 알맞게 정돈하니 괜한 물건을 쓸데없이 충동적으로 샀다는 후회는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듯했다. 대단한 의미까지는 아니고, 그냥 예쁜 것은 보기 좋고, 보기 좋은 걸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행복하다는, 그런 하잘것 없는 의미 정도다.
(미디어에 세뇌된 결과라 해도 크리스마스 장식은 확실히 예쁘다)
작년에 만들어둔 나의 장식 공간은 봄이 되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눈사람이 녹아 없어지듯이 저절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어느날 버려진 책을 과감히 일흔 권쯤 주워오는 바람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보기 좋은 공간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수많은 책을 꼴보기 싫게 바닥에 쌓아두느냐, 아니면 보기 좋은 공간도 없애고 쌓여 있는 책들도 치우느냐 둘 중 하나의 가혹한 선택지 중에서 스트레스가 적은 쪽을 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인간이란 원래 손해를 세 배로 심하게 느끼는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의 행복의 제단은 모래사장에 파묻힌 쓰라린 사랑의 결심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내 방은 그야말로 삭막한 장서고처럼 변해버렸다. 예전에 내 책에 ‘나는 책을 밥처럼 본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부연 설명을 더 쓴다는 것을 까먹어서 건방진 놈이 되고 말았다. 해명하자면 나는 밥 먹기를 귀찮아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안 먹으면 죽으니까 챙겨 먹을 때가 적지 않다. 요컨대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넌더리나는 책들에 온통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그 틈바구니에 한 칸 자리한 것이 바로 행복의 제단이었는데, 그 소박한 공간 하나가 사라지고 나니 오아시스가 증발한 사막에 있는 것 같다. 있을 때는 나쁘지 않고 은근히 좋구나 싶은 정도였는데, 잃고 나니 여간 아쉽지 않다.
이후로 책장을 다시 파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무리 봐도 가족 중에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 중에서 팔리는 것은 팔고 나머지는 다시 예쁘게 내놓았다. 가까운 도서관에 있는 책 몇 권도 처분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힌 보드게임 중에서도 여럿을 팔았다. 덕분에 공간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긴 했는데, 그러고도 여지껏 제단을 복구하지는 못했다. 족저근막염을 핑계로 사들이거나 주워다 고친 헌 신발의 상자들이 그 자리를 마구 점거했고, 뒤이어 등산에 맛을 들이는 통에 등산화와 등산 용품 따위도 곳곳에 증식했다. 고통 속에서 미련을 일부 깎아내긴 했지만 다른 물욕이 자라나는 속도가 더 빨랐던 셈이다.
지금도 도저히 깔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방 안을 둘러보면 종종 슬프고 한심해진다. 인간이란 노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퇴행을 마주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쌓고 이뤄서 발전을 하기 마련이다. 이력으로 자기 가치를 쌓기도 하고 돈을 모으기도 하며 훌륭한 인간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쇠퇴의 감산을 하고도 행복을 남기는 보편적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읽지 않는 책과 아주 가끔 신는 신발이라는 부끄러운 삶의 흔적과 의무감만을 늘려가며 혜택받은 환경을 메우고 쇠퇴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게 과한 생각임을 안다. 사람의 얼굴이 생애를 나타내기도 하듯이 방 안의 꼴도 사람이 걸어온 시간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건 전체가 아니라 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방이 돼지우리 같다고 해서 너의 삶이 돼지와 같다고 비난할 수 없듯이 넘쳐나는 나의 책장도 내 삶을 비난하는 근거로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슬픈 것은, 기왕이면 대충 잘라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단면을 지니고 살고 싶으며, 지저분한 방구석처럼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 때 최소한 눈과 마음이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아름다운 틈을 마련해두고 싶은 까닭이다. 저번주도 이번주도 물건을 닥치는대로 정리했고 행사를 보면서도 문자로 중고 거래를 했는데, 언젠가는 채우는 속도보다 덜어내는 속도가 빨라져서 책장 한 칸을 다시 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 내가 죄책감 없이 눈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두면 애써 발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드러난 행복이 밀려오는 퇴행의 토사 가운데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