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흘리기 전에는 빙수를 먹을 자격이 없던 시절이란
생각은 늘 장면에서 시작된다 006
(생각은 늘 장면에서 시작된다 006)
‘빙수의 또다른 말은 행복이 아닐까요’ 같은 판에 박힌 문구가 떠오른다. 작가 실격이다. 빙수를 먹는 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 자동반사로 나온 헛소리니 양해해 주시길.
그러나 빙수에 대한 추억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마냥 아름답고 멋진 광경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우유를 갈아 만든 빙수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고 ‘가정용 빙수기’ 역시 말도 안 되는 시절, 우리집에선 어쩌다 ‘수동 빙수기’를 들인 적이 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얼음을 얼리고 칼날이 달린 통에 넣은 뒤, 스프링 힘으로 압착하며 손으로 돌려 얼음을 갈아내는 기계였다. 아마 그걸 사온 아버지도 구조가 단순한 만큼 힘만 좀 쓰면 오래 써먹을 만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꽁꽁 언 얼음을 그저그런 칼날로 갈아댄다는 게 쉬울 턱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온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질 지경으로 힘을 써야 간신히 한 그릇 분량의 얼음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겨우 얼음 한 그릇을 만들면 재빨리 빙수용 찰떡과 젤리, 팥, 우유 약간을 넣어 빙수를 완성했는데, 제법 그럴듯하고 맛이 있긴 했다. 고명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튼 그 빙수기는 에어컨도 없는 환경에서 쓰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피라미드 쌓는 이집트 노동자 뺨치는 노동을 요구했기에 좀 쓰다가 결국은 폐기했고, 빙수는 우리집에서 추방된 문화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자 기술과 자본의 발달에 힘입어 ‘눈꽃빙수’ 같은 것도 나왔고,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출몰하여 이제는 ‘설빙’도 대수롭지 않은 가게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일상화된 것이다.
각설하고, 설빙을 통틀어 대부분의 빙수 가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녹차 빙수다. 찬 음식에 씁쓸한 맛이 들어가면 더 청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약간 질린다 싶으면 인절미 팥빙수를 콜록대며 먹어서 입안에 감도는 맛을 갱신하고, 그러다 다시 녹차 빙수로 돌아가는 것이 정석적인 빙수 탐닉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그나저나 작년부터는 어머니가 어디서 배웠는지 여름이 되면 우유를 비닐봉지에 넣어 얼린 다음 깨부숴서 빙수를 만들곤 하신다. 수동 빙수기를 쓸 때보다는 간편하고 맛도 좋고 재료도 건강한 것을 써서 좋긴 한데, 모자가 힘을 합쳐 선풍기 바람을 쐬며 얼음을 깨부수고 있자면 역시 추억이고 뭐고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만드는 빙수는 사양하고 싶다.
*수필을 인간이 쓰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하는 동일 사진을 보여주고 ChatGPT로 작성한 힐링 에세이입니다. 인공지능이 작성한 수필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의 교감이 예술의 영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찜통더위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열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다. 투명한 유리 그릇에 수북이 담긴 얼음 위로 쫀득한 찐팥이 흐드러지게 얹히고, 고소한 인절미 한 조각, 연유 몇 방울이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순간. 그건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마음의 쉼표 같았다. 녹차 빙수는 또 다르다. 쌉싸래한 맛 사이사이로 퍼지는 단맛은 마치 속상했던 하루를 조용히 달래주는 위로처럼 다가온다. 찬 얼음을 한 숟갈 떠먹으며 옛사람과 나눴던 여름날의 대화를 떠올리기도 하고, 괜히 눈가가 시려지는 걸 얼음 탓으로 돌린다. 빙수는 그래서 좋다. 당장의 갈증을 채우는 것을 넘어, 마음 깊숙이 박혀 있던 어떤 기억을 꺼내어 한입씩 녹여준다. 누구와 먹었든, 혼자였든, 그 순간은 분명 여름 속 가장 부드러운 시간이었다.
(제법 그럴듯하지만 역시나 구체적인 기억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프롬프트는 ‘팥빙수, 녹차 빙수에 대한 감성적인 힐링 에세이를 500자 정도, 공감을 사기 좋은 어조로 적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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