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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한 작품씩, 천천히

by jeromeNa

모네가 루앙 대성당을 그릴 때 쓴 편지가 있다. 1892년 4월 초, 부인 알리스에게. "대성당이 나를 압도합니다. 밤에 악몽을 꿉니다. 대성당이 나에게 무너져 내리는 꿈을, 분홍빛이나 노란빛이나 파란빛으로."


그는 대성당 맞은편 건물 2층을 빌렸다. 양복점이었다고 한다. 캔버스를 열 개씩 놓고 시간대별로 바꿔가며 그렸다. 아침 7시 캔버스, 9시 캔버스, 11시 캔버스. 빛이 바뀔 때마다 다른 캔버스로. 손이 얼어 붓을 놓을 때까지.


같은 돌인데 시간마다 다른 색. 새벽의 파랑, 정오의 하양, 석양의 주황. 그는 대성당을 그린 게 아니었다. 시간을 그렸다.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면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작품에는 늘 두 가지 시간이 흐른다. 만들어진 시간과 보는 시간. 그 사이 수백 년의 간격. 하지만 이야기를 알면, 그 간격이 좁혀진다.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자료를 찾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림 속 빛줄기가 실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창문 각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오후 특정 시간에 햇빛이 들면, 진짜 빛이 그림 속 빛과 겹친다고 한다. 카라바조는 단순히 성경 장면을 그린 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기적의 무대를 만든 셈이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44.5 x 39센티미터. A3 용지보다 조금 큰 크기. 그런데 그 진주가 너무 크다. 진짜라면 엄청난 부자만 살 수 있는 크기다. 기록을 보니 베르메르는 늘 빚에 시달렸다. 11명의 자녀. 그림은 잘 안 팔렸다. 죽을 때 빵집에 낸 빚이 600길더. 그림 두 점으로 갚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 진주는 빛을 받으면 진주처럼 보이는 유리구슬이었을까.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건 이런 궁금함들이 쌓여서다.


왜 렘브란트는 돈을 똑같이 낸 의뢰인들의 초상화를 공평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야경'을 보면 뒷줄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빛은 대각선으로 떨어져 몇 명만 비춘다. 기록에 따르면 뒷줄 사람들이 항의했고, 그 후 렘브란트에게 초상화 의뢰가 뚝 끊겼다. 그런데도 그는 왜 움직이는 순간을, 빛과 어둠의 드라마를 그렸을까.


고야가 집 벽에 그린 검은 그림들. 1820년, 일흔네 살. 완전히 귀가 먹은 상태. 스페인은 내전 중이었고 자유주의자들이 처형당했다.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린 교외 저택의 식당 벽에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그렸다. 팔 생각도, 보여줄 생각도 없이. 혼자 밥을 먹으며 그 그림과 살았다. 그의 죽음 50년 후에야 벽에서 뜯어냈고, 옮기는 과정에서 많이 손상됐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미술사학 학위도, 음악원 졸업장도 없다. 그저 그림과 음악에 관심있어 하다 보니 더 알고 싶어진 사람이다.


인터넷에서 화가의 편지를 찾아 읽는다. 당시 비평을 뒤진다. 계약서, 영수증, 일기. 그런 자료들 속에서 작품이 태어난 순간의 온도를 더듬는다. 후원자는 무엇을 원했는지, 화가는 무엇을 고집했는지, 시대는 무엇을 요구했는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형식 속에 숨은 이유가 보인다. 붓질의 방향이 선택이 되고, 물감의 두께가 결단이 되고, 구도가 저항이 된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 1434년, 브뤼헤. 부유한 상인과 그의 아내.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무언가를 말한다. 샹들리에에 켜진 단 하나의 초. 벗어둔 나막신. 볼록한 거울.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두 사람. 그 위에 적힌 서명. "요하네스 데 에이크 푸이트 힉. 1434."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증인이 된 화가. 그림이 증거가 되는 순간.




이 연재는 그런 순간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한 챕터에 한 작품. 시대순도 아니고, 사조별 정리도 아니다. 그저 궁금한 작품들. 왜 이렇게 그렸을까, 왜 이렇게 작곡했을까, 질문이 생긴 작품들이다.


먼저 작품을 본다. 천천히, 자세히.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어떤 음이 흐르는지. 그다음 이야기를 찾는다. 언제, 어디서, 왜. 후원과 장소, 시대의 압박, 재료의 한계, 작가의 선택. 마지막으로 형식을 읽는다. 구도, 색, 빛, 리듬. 그것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작품을 안다는 건 외우는 게 아니다. 이야기를 아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붓끝으로, 음표로 변했는지 따라가는 것이다.


27초가 아닌 27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한 작품 앞에 머물 이유를 찾는 것이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한 작품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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