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야경>
움직인다. 363 x 437cm 캔버스 속 34명의 인물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검은 옷의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가 손을 뻗는다. 크림색 제복의 부관 빌럼 판 라위텐뷔르흐가 몸을 돌린다. 붉은 옷의 남자가 화승총에 화약을 넣는다. 누군가의 총이 발사된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북이 울린다. 개가 짖는다. 소녀가 닭을 매달고 지나간다.
정지된 단체 초상화가 아니다. 출동하는 순간이다. 1642년 7월, 이것이 공개됐을 때 암스테르담은 놀랐다.
클로베니어스도엘렌. 화승총 사수 길드회관. 암스테르담 시민군 중대가 모이는 곳. 새로 지은 연회장의 각 중대마다 하나씩 벽을 장식할 그림 7점이 필요했다.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와 17명의 대원이 1640년경 의뢰했다. 각자 100길더씩, 총 1,600길더. 당시로선 거액이었다. 렘브란트의 집값이 13,000길더였으니 상당한 금액이다.
그림이 너무 커서 렘브란트의 작업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원에 임시 작업장을 지어 그렸다고 전해진다.
다른 화가들의 시민군 초상화는 달랐다. 전형적인 구성은 줄지어 선 인물들이거나 연회 장면이었다. 각자 똑같이 돈을 냈으니 똑같이 공평하고 정적이고 품위 있게 보여야 했다.
렘브란트는 규칙을 깼다. 정지된 초상화 대신 움직이는 장면을 그렸다. 대장이 명령하고, 부관이 중대를 움직이게 하는 순간. 마치 실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빛이 선택적이다. 어둠 속에서 몇 명만 비춘다. 대장과 부관, 그리고 신비한 소녀. 이 이중 스포트라이트 효과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인상을 준다.
렘브란트의 제자 사무엘 판 호흐스트라텐이 나중에 썼다. "구성의 통일성은 칭찬할 만하지만, 더 많은 빛을 넣었더라면 좋았을 것". 이 비평이 '야경'이 거부당했다는 신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 현대 미술사 연구는 1642년의 위기설을 의문시한다. 야경이 거부당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닝 코크 대장은 개인 복사본을 소장했다. - 실제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에 덧칠한 바니시와 오염 때문에 그림이 어둡게 변해 생긴 오해였다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
뒷줄 사람들이 불평했다는 이야기는 있다. 돈을 똑같이 냈는데 얼굴이 거의 안 보인다고. 그림자에 묻혀버렸다고.
소녀를 보자. 밝은 노란색 드레스. 허리에 죽은 닭이 매달려 있다. 닭발(클라우)은 화승총 부대(클로베니어)의 상징이다. 발음이 비슷해서 생긴 문장. 소녀 머리 옆에 은제 술잔도 보인다. 중대의 마스코트일까, 상징일까.
전문가들은 소녀의 얼굴을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와 비교한다. 1642년, 그녀가 죽은 해.
사스키아는 1642년 6월 14일 결핵으로 사망했다. 29세였다. 아들 티투스를 낳은 지 9개월 후였다. 이전에 세 아이를 잃었다. 모두 생후 몇 주 만에 죽었다. 티투스만 살아남았다.
렘브란트가 그린 병상의 사스키아. 그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빨간 분필로 그린 스케치들. 점점 야위어가는 모습. 마지막 초상화에서 눈 밑에 다크서클, 마르고 생기 없는 머리카락.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는 잊지 않았다. 빨간 꽃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
야경을 완성할 때, 사스키아는 죽어가고 있었거나 이미 죽었다. 빛과 어둠의 드라마는 삶과 죽음의 드라마와 겹쳐진다.
무기의 사용법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서 화약을 넣고, 중앙에서 발사하고, 오른쪽에서 총을 청소한다. 교육 매뉴얼처럼 화승총 사용의 세 단계이다.
대장의 그림자가 부관의 노란 제복에 떨어진다. 그 그림자 속에 암스테르담 시의 문장이 보인다. 도시가 시민군의 손에 안전하다는 메시지.
깃발이 펄럭인다. 창이 솟아있다. 헬멧이 빛난다. 도시의 문을 지키는 수호자들. 거리를 순찰하고, 불을 끄고,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
하지만 황금시대는 그리 황금빛이 아니었다. 렘브란트가 그리는 동안, 일부 의뢰인들이 관리하는 암스테르담 고아원의 아동 성착취. 전임 지휘관의 의문스러운 죽음.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 《나이트워칭》(2007)은 렘브란트가 그림 속에 암호를 숨겼다는 가설를 주제로 이런 음모론을 다룬다.
1715년, 그림이 시청으로 옮겨졌다. 네 면을 모두 잘랐다. 기둥 사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19세기 이전엔 흔한 일이었다.
왼쪽 두 인물이 사라졌다. 아치 꼭대기도, 난간도, 계단 가장자리도 잘렸다.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헤리트 륀던스의 17세기 복사본이 원본 구성을 보여준다.
2021년, 인공지능으로 잘린 부분을 재현했다. 륀던스의 복사본을 바탕으로 원근법을 수정하고 렘브란트의 색채와 붓질을 재현했다. 3개월간 전시됐다. 원본이 중앙에 배치된 인물들을 왼쪽으로 치우치게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빈 공간으로 행진하는 역동성.
18세기 후반, 어두운 니스 때문에 '야경'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실제론 새벽의 출동 장면이다.
1643년부터 1652년까지 렘브란트의 회화 제작이 급격히 줄어든다. 초상화 의뢰를 받지 않았거나, 받지 않기로 했거나 줄어들었다.
렘브란트 신화의 핵심은 야경 이후 그가 몰락했다는 이야기다. 사울이 바울이 되듯 극적 전환을 겪었다는 서사가 만들어졌다. 사스키아의 죽음과 야경의 거부가 그 원인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렘브란트는 1642년 이후에도 많은 의뢰를 받았다. 파산은 그 자신의 사치스러운 취향 때문이었다.
어쩌면 예술적 위기였을지도 모른다. 20년간 발전시켜온 회화 언어가 마침내 한계에 부딪혔을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 효과는 더 이상 진전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을 것이다. 1643년 이후 보이는 양식의 변화는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복사본을 연구했다. 대칭과 비대칭의 문제에 매료됐고, 정적인 구도에 움직임을 넣는 방법을 탐구했다.
야경은 그 답이었다. 34명이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특정 행동이 그들의 역할을 정의한다. 누군가는 화약을 넣고, 누군가는 발사하고, 누군가는 총을 청소한다. 명령하는 사람, 따르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뒤섞여 있다.
카오스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된 구성이다.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인물들,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시선들, 빛이 만들어내는 경로. 모든 것이 극장처럼 연출됐다.
렘브란트 자신도 있다. 베레모와 눈 하나만 보이는 자화상. 뒤쪽 그림자 속. 카라바조 처럼, 목격자로서의 화가.
지금 야경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명예의 전당 끝에 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매년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네덜란드 회화 황금시대의 모든 역사가 이 한 점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2019년부터 '오퍼레이션 나이트워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공개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X선 촬영, 안료 분석, 디지털 스캔을 거치며 밑그림이 드러났다. 렘브란트가 시도했다가 포기한 구도들이 발견됐다.
이것은 움직임의 초상화다. 정지가 아닌 행진이고, 줄 세우기가 아닌 드라마다. 공평한 조명이 아닌 선택적 빛이 지배한다.
모든 혁신에는 대가가 따른다. 뒷줄에 선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림자에 묻힌 얼굴들이 항의했다. 100길더를 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초상화가 아닌 역사화를 그렸다. 개인이 아닌 순간을 포착했고, 정지가 아닌 움직임을 담았다.
빛이 선택한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엑스트라인지 빛이 결정한다. 민주적이지 않은 빛이 드라마를 만든다.
사스키아가 죽던 해, 렘브란트는 가장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렸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시민군은 출동하고, 사람들은 영원히 행진한다.
어둠 속의 빛.
정지 속의 움직임.
죽음 속의 생명.
모든 모순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그것이 바로크다.
그것이 렘브란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