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빛이 들어온다. 창문 너머로 사선으로 떨어지는 빛. 322 x 340cm 캔버스 속 어두운 세관에 한 줄기 빛이 비집고 들어와 탁자 위 동전을 세던 다섯 남자를 비춘다. 오른쪽 끝에서 한 손이 들려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 수염 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킨다. "나요?"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따라가니라." 단 한 문장의 이야기. 카라바조는 이것을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으로 포착했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로마의 프랑스인 성당. 콘타렐리 경당은 왼쪽 끝, 가장 어두운 곳. 경당의 유일한 자연광원인 뒤편 창문. 카라바조는 이 창문의 각도를 정확히 계산했다. 오후 특정 시간, 햇빛이 들면 그림 속 빛과 일치한다.
그림이 창문이 되는 순간. 빛이 캔버스를 뚫고 저 너머 어두운 방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1600년 7월, 공개됐을 때 로마는 충격에 빠졌다.
손을 보자. 그리스도의 손.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그린 '아담의 창조'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창조하는 신의 손이 아니라 창조받는 아담의 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이라 불렀다. 첫 아담이 불순종으로 인류를 죄에 빠뜨렸다면, 둘째 아담은 순종으로 인류를 구원한다. 손 하나로 신학을 압축했다. 창조가 아닌 재창조의 제스처이다.
누가 마태오일까. 중앙의 수염 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테이블 끝 젊은이를 가리키는지 논란이 있다. 젊은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동전을 센다. 빛을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외면한다.
수염 난 남자의 오른손은 여전히 돈을 향해 뻗어있다. 왼손은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갈라져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매달린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기 직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
다섯 명의 반응이 모두 다르다. 깃털 모자의 젊은이는 호기심에 찬 얼굴. 안경 쓴 노인은 동전을 움켜쥔다. 어린 소년은 그리스도 쪽으로 기운다. 모두 당대 의상을 입었다. 벨벳 조끼, 깃털 장식, 칼. 1세기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1600년 로마의 선술집 풍경이다.
세속의 빛과 신성한 빛이 충돌한다. 왼쪽 위 창문에서 들어오는 일상의 빛.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광원이 보이지 않는 초월적 빛. 두 빛이 만나는 지점에 마태오가 있다.
프랑스 추기경 마티외 쿠앵트렐(이탈리아명 마테오 콘타렐리)이 1585년 사망하며 거액을 남겼다. 자신의 수호성인 마태오를 주제로 한 경당 장식. 구체적 지시도 있었다. 세관에서 부름 받는 장면, 복음서를 쓰는 장면, 순교 장면.
처음 의뢰받은 주세페 체사리는 천장 프레스코만 그리고 바빠졌다. 14년이 흘렀다. 1599년, 희년(Jubilee - 가톨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영적 은혜를 베푸는 성스러운 해로 성년)을 앞두고 서둘러야 했다. 프레스코 대신 캔버스 유화라는 혁신적 선택. 로마 경당에서 막 시작된 새로운 경향이었다.
1599년 7월 23일 계약. 좌우 벽화 두 점에 400 스쿠디(당시 약 10년 치 일반 노동자 연봉). 1600년 7월 설치. 정확히 1년. 빠른 작업이었다.
오른쪽 벽, <성 마태오의 순교>. X선 촬영으로 두 번의 수정이 발견됐다. 처음엔 거대한 건축물과 작은 인물들로 그렸지만, 매너리즘 양식이었기에 다시 그렸다. 라파엘로풍으로 군중을 추가하고 또다시 그렸다.
최종본. 건축물은 사라졌다. 세례당. 사제복 입은 마태오를 벌거벗은 청년이 칼로 찌른다. 천사가 순교의 종려나무를 건넨다. 중앙의 소용돌이. 도망치는 사람들, 놀라는 사람들, 공포에 질린 얼굴들.
구석에 뒤돌아보는 남자.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다. 목격자로서의 화가.
제단화 <성 마태오와 천사>는 두 번 그려졌다. 첫 번째 버전. 농부처럼 거친 마태오. 더러운 맨발이 정면을 향한다. 문맹처럼 보이는 노인을 소년 같은 천사가 손을 잡고 글쓰기를 가르친다.
사제들이 거부했다. "다리를 꼬고 더러운 발을 대중에게 내민 모습은 품위도 없고 성인답지도 않다".
두 번째 버전. 학자의 로브를 입은 마태오. 천사는 공중에 떠서 지시한다. 거리감이 생겼다. 그래도 발은 여전히 맨발. 작은 저항이다.
세 그림이 만드는 서사. 부름-기록-죽음. 세속에서 신성으로, 다시 죽음으로. 원을 그리는 이야기. 경당 전체가 하나의 극장이 된다.
1600년 7월 공개되어 정통 매너리즘이 바로크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자연의 유일한 모방자", "기적"이라 불렀다.
매너리즘과 달리 명확했다.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눈에 보인다. 복잡한 알레고리(어떤 정신적·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 없이, 인간적 감정만으로 신성을 표현했다.
혁명은 빛에 있었다. 키아로스쿠로(명암의 강한 대비를 활용해 입체감과 깊이감을 표현하는 기법), 명암의 극적 대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빛의 물리학이었다. 실제 창문과 그림 속 빛의 일치.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지운다.
인공조명 아래서는 그저 뛰어난 그림일 뿐이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 순간, 400년 전 계산이 작동한다. 진짜 빛이 그림 속으로 연장된다. 캔버스가 사라지고 공간이 열린다.
저 너머 어두운 방. 동전을 세던 손이 멈춘다. 고개를 든다. 의자에서 일어서기 직전. 영원히 정지된, 그러나 곧 움직일 순간이다.
모든 부름은 이렇게 온다. 일상의 한복판에, 예고 없이. 우리가 가장 세속적일 때, 가장 자신에게 몰두해 있을 때. 빛이 들어온다. 손가락이 가리킨다. "너다."
그리고 망설인다. 마태오처럼. 한 손은 과거를, 한 손은 미래를. 일어서기 직전, 아직 일어서지 않은 그 찰나에 매달려. 카라바조는 그 순간을 붙잡았다. 빛으로, 그림자로, 시선으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 가장 신성한 순간이 되는 기적.
창문이 된 그림.
시간을 멈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