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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그림이 된 순간

비발디 <사계>

by jeromeNa

그림에 관한 글만 쓰다가, 음악 관련 글은 처음이기에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음악인 <사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https://youtu.be/bRzDrOMI5Bg?si=kkvyaQEnCOOtybBw


바이올린이 새소리를 낸다. 트릴(빠르게 떠는 기법)로 떠는 고음이 지저귐이 되고, 스타카토(짧게 끊어 연주)로 끊어진 음들이 부리로 쪼는 소리가 된다. 그 아래 현악기들이 시냇물을 흐르게 한다.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음형. 봄이 온다는 것을, 악기들이 말한다.


<사계>는 네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형식)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3악장(한 곡을 이루는 독립된 부분)씩, 총 12악장. 각 악장은 5분 내외. 짧다. 그러나 그 안에 천둥이 치고 개가 짖고 농부가 술에 취해 잠들고 얼음이 깨진다.




Vivaldi.jpg 안토니오 비발디, 위키피아


1703년, 스물다섯 살의 안토니오 비발디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빨간 머리였다. '붉은 머리의 신부'라고 불렸다. 천식이 있었다. 미사를 올리다가 숨이 차서 제단을 떠나곤 했다. 1년 만에 미사 집전을 그만뒀다.


같은 해 9월,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피에타 음악원(Ospedale della Pietà)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됐다. 오스페달레. 병원이자 고아원이자 음악학교였다. 14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세운 자선기관이다. 버려진 소녀들, 사생아들, 부모가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이 수용됐다. 베네치아에는 이런 기관이 네 곳 있었고, 피에타는 그중 하나였다.


소녀들은 음악을 배웠다. 바이올린, 플루트, 오보에, 바순. 어떤 악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흰 옷을 입고 머리에 석류꽃을 꽂았다. 수녀처럼 생활했다. 약 40명이 오케스트라를 이뤘다. 여성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18세기 유럽에서 드문 일이었다.


프랑스 여행가 샤를 드 브로스가 1739년에 남긴 기록이 있다. "오페라보다 뛰어나다.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다." 장 자크 루소도 『참회록』에서 피에타 음악원의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 베네치아를 찾은 외국인들에게 피에타의 연주회는 필수 코스였다.


비발디는 첫해 연봉으로 60두카트를 받았다. 아버지 연봉의 4배였다. 공식 직함은 바이올린 교사였지만 실제로는 모든 악기를 총괄했다. 1716년, '합주 교사'(maestro de' concerti)가 됐다. 작곡, 지휘, 교육. 모두 그의 몫이었다.


비발디는 빨랐다. 표준 협주곡 한 곡을 24시간 안에 완성했다. 오페라 한 편은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베껴 쓰는 것보다 내가 작곡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피에타의 소녀들을 위해 곡을 썼다. 매주 연주회가 있었다. 의자 대여료로 운영비를 충당했다. 비발디의 곡이 인기를 끌수록 음악원의 재정이 나아졌다. 소녀들은 선생의 새 작품을 연주했고, 선생은 그 연주를 통해 명성을 쌓았다.




Antonio_Vivaldi,_Cimento_dell'_Armonia_e_dell'_Inventione,_Op._8,_ribro_primo.png 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위키피아


<사계>가 언제 완성됐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1718년에서 1723년 사이로 추정된다. 1725년, 암스테르담의 르 세느(Michel-Charles Le Cène)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작품집 제목은 『화성과 창의의 시도』(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1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수록됐고, 그중 첫 네 곡이 사계였다.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백작(Count Wenceslas Morzin)에게 헌정됐다.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의 고문이자 비발디의 후원자였다. 헌정사에는 이 곡들이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백작에게 사랑받아왔다고 쓰여 있다. 백작의 오케스트라가 프라하의 모르진 궁전에서 이미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협주곡마다 14행의 시가 붙어 있다. 소네트라 불리는 형식이다. 누가 썼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비발디 자신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각 소네트는 3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협주곡의 3악장에 정확히 대응한다.


https://youtu.be/dhTQKbtZ6f4?si=fu_Xj1bsfAysJw5S


봄의 소네트 첫 부분. "봄이 왔다, 즐겁게 / 새들이 기쁜 노래로 봄을 맞이하고 / 샘물은 서풍의 숨결에 / 감미로운 속삭임으로 흐른다."


소네트 외에도 비발디는 악보에 직접 지시를 적어 넣었다. '짖는 개'(봄 2악장), '더위로 인한 나른함'(여름 1악장), '술 취한 자들이 잠들다'(가을 2악장). 소네트의 각 행 옆에 대문자를 표시하고, 악보의 해당 부분에 같은 문자를 적었다. 시의 어느 구절이 음악의 어느 부분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했다. - 비발디 사계 자필 악보는 이탈리아 토리노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https://youtu.be/j_DYBIY4CV4?si=RsjdYx8QmrE2JLOR


여름 3악장. 폭풍우. 바이올린이 번개를 긋는다. 빠른 음계(계단처럼 이어지는 음의 흐름)가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 전체 현악이 천둥을 만든다. 강한 화음의 반복. 그 사이사이 독주 바이올린이 비에 맞는 곡식을 그린다. 흔들리고 부러지는 음형.


https://youtu.be/e_tDWdljCuw?si=NBMB_yCVJynKDxCd


가을 1악장. 농부들의 축제. 춤추는 리듬. 바카스의 술에 취한 자들. 음정이 흐트러지고, 박자가 비틀거린다. 멜로디가 비틀거리다가 느려지고, 마침내 잠든다.


https://youtu.be/z3W3jJ1atgw?si=rx6NYYhrnErB2odQ


겨울 1악장. 떨리는 트레몰로(같은 음을 빠르게 반복). 차가운 바람. 독주 바이올린이 추위에 떠는 사람을 그린다. 음이 짧게 끊기고, 쉼표가 자주 온다. 숨을 참는 것처럼. 2악장은 실내. 따뜻한 불가. 독주 바이올린이 서정적인 선율을 노래한다. 그 아래 피치카토(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연주)로 뜯는 현악기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3악장. 얼음 위를 걷는다. 음이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미끄러진다. 음계가 빠르게 내려간다. 넘어진다.




(Venice)_Landscape_with_Streams,_Monks,_and_Washerwomen_by_Marco_Ricci_-_Gallerie_Accademia 중간.jpeg
Accademia_-_La_cascata_-_Marco_ricci_Cat.454_(convento_di_San_Giorgio_Maggiore).jpg
<강과 인물이 있는 풍경>. 1715년, <폭포>, 마르코 리치


비발디는 이탈리아 풍경화가 마르코 리치(1676-1730)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리치의 그림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강물 위로 밀려오는 파도 같은 생생한 움직임을 담았다. 비발디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일치했다.


18세기 초반 기악곡은 대부분 추상적이었다. 음악은 음악 자체였다. 그러나 비발디는 달랐다. 이 작품은 표제음악(program music)으로 분류된다. 악기만으로 음악 밖의 무언가를 불러내는 시도. 당시로서는 실험적이었다.


1725년 출판 직후, 이 작품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다.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자주 연주됐다. 봄 협주곡은 미셸 코레트가 합창 모테트로 편곡했고, 장 자크 루소는 플루트 독주 버전을 만들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연구했다. 17곡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했다. 비발디에게서 협주곡 형식을 배웠다.


그러나 비발디가 죽고 나서 그의 음악은 잊혔다. 1741년 7월, 비발디는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중반, 바흐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비발디도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바흐가 편곡한 곡들을 거슬러 올라가니 비발디가 있었다.


https://youtu.be/KAj81arTOMQ?si=0bm0OMmhT1ExYGVF


<사계>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1955년, 이탈리아 실내악단 '이 무지치'와 바이올리니스트 펠릭스 아요의 녹음이 결정적이었다. 이 녹음은 원전 악보에 충실한 첫 녹음으로 평가받는다.


이제 <사계>는 클래식 음악 중 가장 많이 연주되고 가장 많이 녹음된 작품 중 하나다. 약 1,000여 종의 음반이 나와 있다.




Chiesa_della_Pietà_Venezia.jpg Ospedale della Pietà, https://storiedibambini.org/sedi/venezia/


피에타 음악원은 지금도 베네치아에 있다. 건물은 1760년에 완공됐다. 비발디가 죽은 뒤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비발디의 음악이 연주된다.


소네트가 없어도 음악은 스스로 말한다. 새가 운다. 물이 흐른다. 천둥이 친다. 농부가 춤춘다. 추위에 떤다. 300년 전 악보에 적힌 음표들이 지금도 똑같은 장면을 만든다.


비발디는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사 없이도, 설명 없이도, 악기만으로 세상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


베네치아 피에타의 소녀들이 처음 이 곡을 연주했을 때, 그들도 봄의 새소리를 냈을 것이다. 흰 옷을 입고 석류꽃을 꽂고서. 그 소리가 운하 위로 흘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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