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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의 피에타

다비드, <마라의 죽음>

by jeromeNa
Death_of_Marat_by_David.jpg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위키백과


피가 욕조 물에 번진다. 165 x 128cm 캔버스 속에서 장 폴 마라가 죽어있다. 오른팔이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졌다. 손에는 여전히 깃펜을 쥐고 있다. 왼손에는 피 묻은 편지. 머리는 뒤로 젖혀졌고, 터번처럼 감은 천이 풀어져 있다. 가슴 아래 칼자국에서 피가 흐른다.


바닥에 칼이 떨어져 있다. 5인치 부엌칼. 나무 상자가 책상 역할을 한다. 그 위에 잉크병과 종이. 상자 전면에 다비드가 써넣었다. "마라에게, 다비드." 묘비명처럼.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가 마라를 암살했다. 25세 귀족 출신 여성. 지롱드파 동조자. 마라가 9월 학살의 원흉이라 믿었다.




Jean-paul_marat_3.jpg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위키백과


장 폴 마라. 의사 출신 언론인. 신문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을 발행하며 가장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조치들을 지지했다. 1792년 국민공회 의원이 되어 몽타뉴파를 이끌었다.


피부병 때문에 욕조에서 일했다. 아마도 포진상 피부염. 끊임없이 가려웠고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만이 유일한 완화법이었다. 머리에는 식초에 적신 천을 둘렀다.


욕조는 나막신(사보) 모양이었다. 나무판을 가로질러 놓아 책상으로 썼다. 리넨 시트에 앉아 있었고, 마른 부분으로 어깨를 덮었다. 썩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 욕조가 그의 사무실이었다. 처형자 명단을 작성하는 곳. 누가 단두대로 갈지 결정하는 곳.




코르데는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처음 두 번은 마라의 처제와 약혼자 시몬 에브라르에게 막혔다. 7월 13일, 편지를 들고 왔다.


편지에는 "1793년 7월 13일. 마리안느 샤를로트 코르드레가 시민 마라에게. 내가 불행하기에 당신의 선의에 호소할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지롱드파 배신자 18명의 이름을 알려주겠다는 거짓말이다.


마라가 직접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그들을 모두 단두대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한 번만 찔렀다. 재판에서 연습했냐고 물었다. 코르데가 외쳤다. "괴물 같으니! 나를 암살자로 보다니!"

"나는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죽였다". 코르데의 마지막 변론이었다.




다비드와 마라는 친구였다. 둘 다 자코뱅파. 다비드는 공안위원회 위원이자 공교육위원회 소속. 심문과 투옥에 적극 참여했다.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마라의 암살로 그는 순식간에 인민의 순교자가 됐다. 정부는 다비드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혁명 영웅의 성전을 만들기 위해.


다비드는 빠르게 그렸다. 친구의 죽음을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기독교가 금지된 시대, 가톨릭 성인을 대체할 혁명의 순교자를 찾아야 했다.


The_Entombment_of_Christ-Caravaggio_(c.1602-3).jpg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매장>, 1603, 위키백과


카라바조의 영향이 명확하다. <그리스도의 매장>(1603)과 구도가 유사하다. 늘어진 팔, 성흔 같은 상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바탕으로 마라를 그렸다. 새로운 시민 종교의 제단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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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텅 비었다. 어두운 공간. 미완성처럼 보이는 붓질. 전경의 구체성과 대비된다. 부드럽고 신성한 빛이 마라의 얼굴과 몸을 비춘다.


마라의 표정에는 놀라움이나 공포가 없다. 중립적이다. 마치 잠든 것처럼. 평화로운 죽음. 고통 없는 순교.


그러나 디테일이 폭력을 증언한다. 피 묻은 편지, 떨어진 칼, 가슴의 상처. 모든 서사적 세부사항이 전경에 배치됐다. 고통과 분노를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욕조는 세례반을 연상시킨다. 정화와 순수의 상징. 그리스도적 포즈의 정치적 순교자. 혁명의 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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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실제와 다르다. 그림 속 편지는 마라를 선한 사람으로 만든다. 실제론 처형자 명단을 작성하던 중이었다.


나무 상자 위의 또 다른 편지. 전사한 병사의 미망인에게 돈을 보내라는 마라의 지시. 이것도 마라를 인민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한 조작이다.


"2년"이라고 썼다. 1793년이 아니라 혁명 2년. 구체제를 새로운 혁명 질서로 대체. 달력도, 도량형도,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됐다.




코르데는 7월 17일 처형됐다. 25세 생일 10일 전. 빨간 옷을 입혔다. 인민의 대표를 암살한 반역자의 표시이다.


목이 잘린 후, 르그로라는 남자가 머리를 들어 뺨을 때렸다. 목격자들은 "분명한 분노의 표정"을 봤다고 증언했다.


마라는 영웅 장례식을 받았다. 파리 거리를 행진했고 판테온에 묻혔다. 울부짖는 시민들. 혁명 최대의 프로파간다 이벤트였다. 코르데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던져졌다. 의식도 없이. 공포정치 희생자들 사이에.




1794년 공포정치가 끝났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됐다. 다비드는 재판받고 활동을 부인해 겨우 살아남았다. 두 번 투옥됐다가 1795년 석방됐다.


여론이 바뀌었다. 그림은 파괴될까 두려워서 숨겼다. 마라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됐다가 1815년 워털루 전투 후 브뤼셀로 망명했다. <마라의 죽음>을 가지고 갔다. 1825년 마차 사고로 다쳐 죽었다.


후손들이 브뤼셀 시에 기증했다. 지금도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있다.




img-202109156141c4d4a1aab-iPad.jpg 폴 보드리,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 1860, 데일리아트


19세기, 샤를로트 코르데는 영웅이 됐다. "암살의 천사"라 불렸다. 폴 보드리의 1860년 그림은 코르데를 그려 넣었다. 다비드의 구도를 90도 돌려 살인자를 보여줬다.


샤를 보들레르가 1845년 이 그림을 재발견했다. "현대 최초의 미술비평가"가 혁명의 아이콘을 부활시켰다.


20세기, 피카소와 뭉크가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피터 바이스의 연극 〈마라/사드〉. 2013년 리처드 윌슨이 레이디 가가를 마라로 그렸다.




혁명의 피에타. 정치적 순교. 조작된 진실. 다비드는 모든 것을 알고 그렸다. 마라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그래도 성인으로 그렸다. 빛 속에서 평화롭게 죽은 순교자로. 이것은 폭력에 대한 찬미이자 더 많은 유혈을 선동하는 정치적 성명이었다.


예술이 거짓말을 할 때.

아름다움이 진실을 가릴 때.

그림이 역사를 조작할 때.

예술이 살인자를 성인으로, 공포정치를 성스러운 혁명으로 둔갑시킨다.


하지만 그것도 진실이었을 것이다. 혁명의 광기. 친구를 성인으로 만드는 절박함. 적을 악마로 만드는 증오. 모든 것이 이 한 장면에 압축됐다.


피 묻은 욕조. 떨어진 칼. 편지를 쥔 손. 죽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신화를 그렸고, 거짓을 그렸다. 그리고 그 거짓이 진실이 됐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적 프로파간다.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

가장 위험한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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