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콘 군상
세 명이 뱀에 감긴 채 죽어간다. 아버지와 두 아들. 대리석 높이 208cm. 로마 바티칸 미술관 팔각형 중정에 서면 이 조각이 정면에서 맞선다. 중앙의 라오콘, 그의 왼쪽 허벅지를 휘감은 뱀, 오른팔을 뒤로 밀어내며 몸부림치는 자세. 왼쪽 아들은 이미 힘이 빠져 늘어지고, 오른쪽 아들은 뱀의 꼬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근육이 뒤틀린다. 복부는 수축하고, 어깨는 긴장하고, 목은 뒤로 젖혀진다. 입이 벌어져 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리석의 침묵.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비명이 느껴진다. 고통을 조각으로 새긴다는 것의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보이는 순간이다.
1506년 1월 14일.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 포도밭주인 펠리체 데 프레디스가 땅을 파다가 구덩이를 발견했다. 트라야누스 황제 욕장 폐허 근처였다. 흙 속에서 하얀 대리석 조각들이 드러났다.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보냈다. 상갈로는 미켈란젤로를 데려갔다. 서른한 살의 미켈란젤로가 구덩이를 들여다봤다. 그가 4년 전 완성한 피에타 조각상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77-79년경 집필) 제36권 37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로도스 섬의 조각가들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가 만든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뱀들의 놀라운 얽힘을 보라. 티투스 황제의 궁전에 있다. 단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모든 회화와 청동 조각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될 작품이다." (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 Book 36, Chapter 37)
땅에서 나온 조각이 플리니우스가 말한 그것이었다. 1천4백 년 만의 귀환. 교황은 즉시 구입했다. 4천 두카트를 주고 산 기록이 남아있다. 조각은 바티침 벨베데레 중정으로 옮겨졌다.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기원전 29-19년 집필) 제2권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리스 군이 물러갔다. 해변에 거대한 목마가 남았다. 트로이인들은 성문을 열고 나왔다. 환호하며 목마를 끌어들이려 했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아폴론 신전 사제였다. 그가 소리쳤다. "트로이인들이여, 믿지 마시오. 그리스인들의 선물은 속임수요. 목마 안에 무언가 숨어 있소." 창을 던져 목마 옆구리를 찔렀다. 안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바다에서 두 마리 뱀이 나타났다. 물을 가르며 해변으로 올라왔다. 라오콘과 두 아들을 향해 돌진했다. 먼저 아들들을 휘감았다. 라오콘이 달려들었지만 뱀은 그까지 휘감았다. 세 명 모두 죽었다.
트로이인들은 라오콘이 신성한 목마를 모독 했기에 신이 벌을 내렸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날 밤 트로이는 함락됐다.
제작 시기는 논란이 많다. 플리니우스는 자기 시대의 작품이라고 했다. 1세기경. 그러나 20세기 학자들은 양식상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제단의 영향을 본다. 현재 통용되는 추정은 기원전 40-30년 경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 사이. (John Boardman, Greek Sculpture: The Late Classical Period, 1995)
로도스 섬. 기원전 305년 거대한 포위 공격을 이겨냈다. 섬은 부유했고 조각 공방들이 번성했다. 세 명의 조각가 이름이 밑받침에 새겨져 있었다고 플리니우스는 적었다. 실제 조각에는 지금 그 명문이 없다. 떨어져 나갔거나 애초에 다른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누가 의뢰했는지는 모른다. 어떤 건물의 어느 위치에 놓였는지도 불확실하다. 플리니우스는 티투스 황제 궁전에 있다고 했으니 1세기 후반에는 황실 소유였다. 그 이전 이력은 추측만 가능하다.
확실한 건 트로이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특별했다. 로마 건국 신화의 시작이 트로이 함락 이후 아이네아스의 탈출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27-14년)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아이네이스』 집필을 후원했다. 자신의 율리우스 가문이 아이네아스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라오콘은 그 이야기 속 비극적 순간이다. 경고를 무시당하고 신들에게 버림받은 사제. 트로이의 운명을 상징하는 인물. 이 조각은 단순한 신화 장면이 아니라 운명과 경고, 비극과 무지에 대한 로마적 성찰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구도는 피라미드다. 세 인물이 삼각형을 이룬다. 라오콘의 머리가 정점. 두 아들의 머리가 양 끝. 뱀이 S자로 휘감으며 세 몸을 연결한다.
대각선들이 교차한다. 라오콘의 오른팔은 뒤로, 왼팔은 앞으로. 오른쪽 아들의 왼팔은 위로, 왼쪽 아들의 오른팔은 아래로. 각 인물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뱀이 하나로 묶는다.
정면성을 유지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뒷면도 완전히 조각돼 있지만 이 작품은 정면에서 봐야 한다. 모든 동작이 관람자를 향한다. 극장 무대처럼.
근육 표현이 과장됐다.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면서도 극적이다. 복직근, 늑간근, 삼각근이 모두 긴장 상태다. 실제 인체보다 더 선명하다. 헬레니즘 조각의 특징이다. 고전기 그리스 조각(기원전 5-4세기)의 이상적 균형에서 벗어나 감정과 고통을 과감히 표현하는 시대. (Richard Brilliant, My Laocoön: Alternative Claims in the Interpretation of Artworks, 2000)
라오콘의 얼굴. 입이 벌어졌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아니다. 신음에 가깝다. 18세기 독일 미술사가 요한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은 1764년 『고대 미술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인들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영혼을 보여준다. 라오콘은 고통받지만 외치지 않는다. 영웅적 인내의 표현이다." (Winckelmann, History of Ancient Art, 1764)
그러나 독일 극작가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1766년 『라오콘』에서 반박했다. "이것은 인내가 아니라 조각의 한계다. 대리석은 절규를 표현할 수 없다. 입을 크게 벌리면 추해진다. 조각가는 매체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택했다." (Lessing, Laocoön: An Essay on the Limits of Painting and Poetry, 1766)
오른팔 복원 논쟁도 있었다. 발견 당시 라오콘의 오른팔이 없었다. 1532년 조각가 조반니 안젤로 몬토르솔리가 곧게 뻗은 팔을 만들어 붙였다. 미켈란젤로는 반대했다고 한다. 팔이 뒤로 꺾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6년 고고학자 루트비히 폴라크가 로마의 한 석재상에서 꺾인 팔 조각을 발견했다. 1957년 교체됐다. 미켈란젤로가 옳았다. (Seymour Howard,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Vatican Laocoön",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1969)
1506년 이후 이 조각은 유럽 예술의 기준이 됐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08-1512)에서 이 구도를 여러 번 썼다. 특히 '뱀에게 물린 사람들' 장면. 라파엘로, 티치아노, 루벤스 모두 라오콘을 그렸다. 베르니니의 바로크 조각들은 이 극적 표현을 계승했다.
엘 그레코는 1610년경 라오콘을 그렸다. 배경을 톨레도로 바꾸고 인물을 길게 늘였다. 신화를 자기 시대로 끌어온 해석이었다.
조각은 지금도 바티칸에 있다. 2천 년 전 로도스 섬에서 만들어져, 로마 황제의 궁전에 놓였다가, 땅에 묻혔다가, 다시 나와 교황의 소유가 됐다. 경고를 무시당한 사제의 운명이 대리석에 새겨져 여전히 비명 없는 비명을 지른다.
형식이 고통을 담는 방식.
대리석이 죽음을 영원히 붙잡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