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피에타>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다. 높이 174cm, 너비 195cm의 카라라 대리석. 성 베드로 대성당 첫 번째 소성당, 방탄유리 뒤에서 이 조각이 빛을 받는다.
마리아의 옷자락이 파도처럼 흐른다. 주름이 깊고 복잡하다. 무릎 위에 그리스도의 몸이 대각선으로 누워 있다. 오른팔이 아래로 늘어지고,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왼쪽 옆구리에 창자국이 보인다. 죽음의 무게가 대리석에 새겨졌다.
마리아의 얼굴은 젊다. 스물이나 될까. 죽은 아들은 서른셋. 어머니가 아들보다 어려 보인다. 왼손은 그리스도를 받치고, 오른손은 살짝 펼쳐져 있다. 슬픔이지만 절규가 아니다. 고요한 수용. 대리석이 만들 수 있는 침묵의 극한이다.
1497년 여름.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리에르 드 라 그롤라예(Jean de Bilhères de Lagraulas)가 로마 은행가 야코포 갈리를 통해 조각을 의뢰했다. 갈리의 집 정원에는 이미 젊은 조각가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스물두 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든 술 취한 바쿠스다.
계약서가 남아 있다. 1498년 8월 27일 공증. 추기경이 450 두카트 금화를 지불하고, 미켈란젤로는 1년 안에 완성한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상, 어떤 대가도 지금 보다 더 잘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고 계약서에 적혔다. (Charles de Tolnay, The Youth of Michelangelo, 1943)
추기경은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로마 대사였다. 산타 페트로닐라 성당에 자신의 장례 소성당을 준비했다. 그곳에 놓을 조각.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준비였다.
미켈란젤로는 카라라로 갔다. 대리석 채석장. 아펜니노 산맥의 흰 산. 로마 시대부터 조각가들이 찾던 곳. 완벽한 돌을 골랐다. 흠 없는 단일 블록. 거기서 두 명을 깎아낼 것이다.
1498년 가을부터 1499년 봄까지. 야코포 갈리의 작업장에서 작업했다고 추정된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대리석 조각의 과정은 파괴다. 끌로 쪼아내고, 정으로 다듬고, 줄로 갈아낸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돌조각이 떨어진다. 덜어내면서 형상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는 나중에 말했다. "조각은 돌 안에 이미 갇혀 있다. 조각가는 그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할 뿐이다." (Giorgio Vasari, Lives of the Artists, 1550)
옷의 주름은 '드릴 워크(drill work)' 기법이다. 가는 드릴로 깊은 홈을 파서 그림자를 만든다. 주름이 겹치는 부분, 팔 아래, 무릎 위. 빛이 들어가지 않는 깊이를 만든다. 얼굴과 살은 점점 더 고운 줄로 갈아 매끄럽게 한다. 마지막은 왁스로 광을 낸다.
그리스도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다. 늑골, 복근, 쇄골. 1492년경, 미켈란젤로가 열일곱 살 때 피렌체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서 해부를 했다는 전승이 있으며, 여러 전기 작가가 이를 언급한다. (Antonio Forcellino, Michelangelo: A Tormented Life, 2009) “죽은 몸을 알아야 죽은 몸을 조각할 수 있다.”
1499년 여름 이전에 완성됐다. 추기경은 8월 6일 사망했다. 자신의 장례 소성당에서 이 조각을 봤는지는 불확실하다. 조각은 산타 페트로닐라 성당에 설치됐다. 16세기 초 그 성당이 철거되면서 현재 위치인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스물넷 청년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일부는 스승 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작품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밤 성당에 들어가 마리아의 가슴 띠에 새겼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다(MICHAEL ANGELUS BONAROTUS FLORENT FACIEBAT)." 바사리는 1550년 전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후회했다. 다시는 자기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다." (Vasari, 1550) 유일하게 서명한 작품이 됐다.
비판도 있었다. 마리아가 너무 젊다는 것. 서른셋 아들의 어머니가 스물처럼 보인다. 콘디비(Ascanio Condivi)가 1553년 미켈란젤로 전기에서 작가의 답변을 기록했다. "순결한 여인은 젊음을 유지한다. 신의 어머니는 더욱 그렇다." (Condivi, Life of Michelangelo, 1553)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형식의 문제. 나이 든 여인이 다 자란 남자를 무릎에 안는 구도는 불안정하다. 비율이 맞지 않는다. 마리아를 젊고 크게 만들어 몸을 안정적으로 받칠 수 있게 한 것이다. 옷자락을 넓게 펼쳐 피라미드 구도를 만들었다. 형식이 신학보다 우선한 선택이다.
피에타는 북유럽 전통이다. 독일어 '베스퍼빌트(Vesperbild)', “저녁 기도의 이미지”. 14세기 독일과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목조각이 많았고, 고딕적 표현이었다. 앙상한 그리스도, 고통스러운 마리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피에타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고전적 이상미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북유럽 주제를 가져와 고전적 형식으로 재해석했다.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였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얼굴은 평온하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이상적 아름다움이 그 표정에 담겨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고전적 나체로 표현됐다. 아폴론 조각을 연상시키는 완벽한 비율이다. 죽음의 주제에 아름다움의 형식을 입혔다. 고통을 승화시킨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은 것이다.
단일 블록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두 인물이 하나의 돌에서 나왔다. 어머니와 아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조각의 통일성이 주제의 통일성이 된다.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 지질학자 라슬로 토트가 망치로 피에타를 공격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열다섯 번 내리쳤다. 마리아의 왼팔이 부러지고, 코가 깨지고, 눈꺼풀이 손상됐다. 복원에 10개월 걸렸다. 그 후 방탄유리 뒤에 설치됐다. (Irving Lavin, "The Sculptor's Last Will and Testament", Allen Memorial Art Museum Bulletin, 1975)
지금도 피에타는 유리 뒤에 있다. 가까이 갈 수 없다. 1498년처럼 무릎 높이에서 올려다볼 수 없다. 원래 배치에서는 관람자가 마리아의 시선보다 낮은 위치에 섰다. 마리아가 내려다보는 구도. 지금은 정면에서 본다. 조각의 의도된 각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대리석은 남았다. 524년 전 스물넷 청년이 1년 동안 깎아낸 형상. 죽음의 무게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순간. 돌이 살이 되고, 옷자락이 물처럼 흐르고, 침묵이 슬픔이 되는 순간이 여전히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