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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자리에 선 그림

벨라스케스, <시녀들>

by jeromeNa
Las_Meninas,_by_Diego_Velázquez,_from_Prado_in_Google_Earth.jpg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위키백과

누가 누구를 보는가. 318 x 276cm 캔버스 속에서 시선들이 교차한다. 다섯 살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우리를 본다. 시녀가 무릎 꿇고 붉은 잔을 건넨다. 난쟁이가 개를 발로 건드린다. 뒤쪽 거울 속에 왕과 왕비가 희미하게 비친다. 왼쪽에서 화가가 붓을 들고 서 있다. 거대한 캔버스 뒤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다.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단 화가. 산티아고 기사단의 문장. 그런데 이상하다. 기록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1659년 11월에야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림은 1656년에 그려졌다.


필립 4세가 화가의 죽음 후 직접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거나, 혹은 제자 후안 데 파레하가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현대 보존 전문가들은 두 개의 분리된 층의 시차가 거의 없다고 확인했다. 십자가는 원본의 일부였다.


시간의 미스터리.


미래의 영예를 미리 그려 넣은 것일까. 아니면 그림을 나중에 완성한 것일까.




1623년, 24세의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가 됐다. 필립 4세의 고문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시인 루이스 데 공고라의 초상화가 계기였다. 필립 4세는 "시인 왕"이라 불렸다. 예술을 후원하고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1024px-Diego_Rodr%C3%ADguez_de_Silva_y_Vel%C3%A1zquez_-_Luis_de_G%C3%B3ngora_y_Argote_-_Google_Art_Project.jpg 벨라스케스, <시인 루이스 데 공고라의 초상화>, 1622, 위키백과


33년간 왕실을 그렸다. 왕, 왕비, 왕자, 공주, 광대, 난쟁이까지. 1651년 2월, 궁정 시종장(aposentador mayor)이 됐다. 지위와 부를 얻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남은 8년간 작품이 급격히 줄었다.


필립의 첫 아내 엘리자베스는 1644년 사망. 외아들 발타사르 샤를도 2년 후 죽었다. 1649년 마리아나와 재혼.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첫 딸이었다. 나중에 신성로마제국 황후가 될 그림 속 다섯 살 공주.


1650년대 초, 필립은 죽은 왕자의 거처를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게 함으로써 벨라스케스에게 작업실로 줬다. <시녀들>의 배경이 바로 그곳이다.




그림 속 인물들.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 저서에서 대부분 신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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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인판타. 양쪽의 시녀 이사벨 데 벨라스코와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오른쪽 난쟁이들, 오스트리아인 마리 바르볼라와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페르투사토. 뒤쪽 수녀복의 마르셀라 데 우요아. 문가의 시종 호세 니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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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가 자신. 팔레트와 붓을 든 채 캔버스 뒤에 서 있다. 무엇을 그리는가? 우리가 보는 이 장면인가? 아니면 우리 자리에 서 있는 왕과 왕비의 초상화인가?


거울이 답을 준다. 혹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뒤쪽 벽의 흐릿한 사각형. 왕과 왕비가 비친다. 그들이 문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왕의 시점에서 보는 것이다. 거울이 우리 뒤를 비춘다면 우리가 왕의 자리에 선 것이다.




필립은 작업실에 자기 의자를 두고 자주 벨라스케스가 일하는 것을 봤다. 엄격한 궁중 예법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관계였다. 벨라스케스가 죽자 필립은 후임 선택 메모 여백에 "나는 무너졌다"고 적었다.


화가는 단순한 장인이었다. 17세기 스페인에서 회화는 예술이 아닌 공예로 여겨졌다. 시나 음악과 달리 낮은 지위. 벨라스케스는 평생 귀족 신분을 원했다.


1658년 산티아고 기사단 입단을 신청했다. 혈통 조사가 시작됐다. 유대인이나 무어인 피가 섞였는지, 상업에 종사한 조상이 있는지. 그림을 '판매'하지 않고 왕을 위해서만 그렸다고 변명해야 했다.


1659년 11월, 마침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마도 왕의 지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1660년 8월 6일, 벨라스케스는 죽었다. 마지막 임무는 마르가리타의 언니 마리아 테레사와 루이 14세의 결혼식 준비였다.




바로크 화가 루카 조르다노는 이 그림을 "회화의 신학"이라 불렀다. 1827년 토마스 로렌스는 "예술의 진정한 철학"이라 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자의 위치.

현실과 환영의 경계.


가까이서 보면 붓질의 연속일 뿐이다. 물러서면 생생한 장면이 된다. 원근법, 기하학, 시각적 환영의 종합. 관람자의 시점이 그림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왕의 자리다.


"회화에 대한 회화"라고들 한다. 3세기 넘게 분석했지만 의미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회화의 고귀함을 주장하는 것일까? 화가의 지위 상승을 꿈꾸는 것일까?




그림은 왕의 여름 궁전 개인 사무실에 걸렸다. 왕만을 위한 그림. 1819년까지 왕실에 있다가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본래 "필립 4세의 가족"이라 불렸다. 1843년 "라스 메니나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순한 가족 초상화 이상임을 인정한 것이다.


1696년 포르투갈 작가 펠릭스 다 코스타는 "황후의 초상화라기보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같다"라고 썼다. 화가가 왕족과 함께 그려진 전례 없는 그림이었다.


붉은 십자가의 수수께끼는 남는다. 3년 후 받을 영예를 미리 그렸든, 왕이 추가했든, 제자가 완성했든. 중요한 건 그것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며, 화가가 마침내 귀족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모든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다린다. 시녀는 공주를, 공주는 부모를, 난쟁이는 반응을, 개는 자극을. 그리고 화가는 인정을.


붉은 십자가를 기다리든, 왕의 시선을 기다리든, 우리는 모두 기다리는 인간들이다.


벨라스케스는 그 기다림을 그렸다. 시선의 그물망 속에서,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현실과 환영의 경계에서. 화가는 붓을 든 채 멈춰 있다. 영원히 그리기 직전. 영원히 완성 직전.


보는 자가 그림을 완성한다. 우리가 왕의 자리에 설 때, 거울이 우리를 비출 때, 그때 비로소 그림이 닫히거나, 열린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화가들의 화가"라 불렀다. 피카소는 <시녀들> 연작 58점을 그렸다.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또 해체했다.


이 그림은 회화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누가 그리는가? 무엇을 그리는가? 누구를 위해 그리는가?


붉은 십자가를 단 화가가 왕실 깊숙이 서 있다. 하인이면서 예술가. 장인이면서 귀족. 그리는 자이면서 그려지는 자. 모든 모순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영원한 수수께끼.


열린 질문.


닫히지 않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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