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이끈다.
3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개발자로 확실히 전향했다. 이력서를 다시 썼다. 이번에는 개발 경력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참여한 프로젝트 목록, 사용한 기술, 맡았던 역할.
개발 분야는 독특했다. 다른 직종과 달리 프로젝트 경험이 곧 평가 지표였다. 자격증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했는지, 그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게 전부였다.
개발 분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됐다. SM, SI, 솔루션.
SM은 운영 및 유지보수다.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관리하고, 버그를 수정하고, 작은 기능을 추가하는 일. 356일 24시간 대기였지만, 매일 오류가 나는 시스템은 없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했고, 저녁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다. 장기적으로 하나의 시스템을 깊게 파고들 수 있다. 다양한 이슈를 만나고, 오류를 해결하며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다.
SI는 프로젝트 개발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처음부터 만드는 일. 프로젝트마다 개발 언어와 시스템이 다르다. 단기간에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정해진 일정에 정해진 개발을 완수해야 한다. 프로젝트가 순탄하지 않으면 야근은 필수다. 쇼핑몰 업체에서 1주일 동안 집에 못 갔던 경험이 떠올랐다.
솔루션은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다. 갑과 을이 없다. 자체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SI처럼 일을 수주하는 구조가 아니다. 일정은 있었지만 타이트하지 않고, 유연하다. SI와 SM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솔루션을 개발하고, 납품하고, 유지보수하는 전 과정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커스터마이즈가 자주 있다. 납품하는 회사마다 요구사항이 달라서 수정과 개발이 반복된다.
고민했다. SM은 안정적이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는 어려웠다. SI는 배울 건 많았지만 일정에 쫓겼다. 솔루션은 균형이 좋았지만 그런 회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개발 분야에는 급수라는 게 있었다. 초급, 중급, 고급, 특급. 신입에서 5년차까지가 초급이었다. 6년에서 10년까지가 중급, 11년 이상이 고급, 16년 이상이 특급. 하지만 이것도 기업마다 달랐다. 고졸, 대졸, 석사, 박사에 따라 년수가 달라졌고,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유무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급수는 단순히 연차로만 정해지지 않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기간으로 계산했다. 입사 후 아무 프로젝트도 참여하지 않았다면 초급으로 계속 남을 수 있다. 반대로 프로젝트 경험이 많으면 초급이어도 상위 업무가 주어진다.
급수가 중요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급수에 따라 책정되는 단가가 달랐다. 프로젝트에 투입될 때 초급 단가, 중급 단가, 고급 단가가 있다. 같은 일을 해도 급수에 따라 받는 돈이 달랐다. IT 분야는 일반 회사의 직급이나 직책보다 급수가 더 중요했다.
15여 년 가까운 경력이 쌓여 있었다. 여러 분야를 거쳤지만, 그 안에서 40%는 꾸준히 개발을 했다. 프로젝트 경험도 제법 있었다. 쇼핑몰, 취업 사이트, SNS, 키오스크. 작은 프로젝트였지만 경험은 경험이었다.
프로젝트 투입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작은 프로젝트였다. 몇 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 투자 관리 시스템, 회원 관리 시스템, 게시판 구축. 익숙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했던 일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기획자가 있고, 디자이너가 있고, 개발자가 여럿이고, PM이 있었다. 각자 역할이 있다. 소통이 중요했다.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게 도움이 됐다. 디자이너가 만든 시안을 보면 이해가 빨랐다. "이거 구현 가능해요?"라고 물어보면 바로 답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다른 프로젝트로 투입됐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프로젝트였다. 6개월짜리, 1년짜리. 점점 규모가 커졌다. 통신사 프로젝트, 공공기관 프로젝트, 대기업 차세대 프로젝트.
산업군마다 중요한 게 달랐다. 쇼핑몰에서는 결제 시스템이 중요했고, SNS에서는 댓글과 팔로우 시스템이 중요했다. 금융권은 보안이 민감했다. 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보안 부분에 예민했다. 공장 자동화 같은 시스템에서는 공정별 연계가 중요했다. 시스템 간 통신이 핵심이었다.
인쇄, 통신, 쇼핑, 면세, 복지, 교육, 철강. 프로젝트마다 분야가 달랐다. 국가기관의 교육용 앱을 만든 적도 있었다. 체험관이나 대형 쇼핑센터에서 바닥에 빔 프로젝터를 영사하고 사람이 지나가면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움직이는 인터렉티브 모션도 개발했다. 온라인 면세점으로 브랜드 상품 판매를 개발했고, 토즈와 같은 공간 대여 예약 시스템도 만들었다.
IT는 특정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필요한 곳이면 거의 모든 분야가 상품이었다. 컴퓨터, 핸드폰 기기 등에서 운영되는 서비스로 한정 지을 수 있었다.
개발은 어디서든 할 수 있었다. 고객을 직접 만날 필요도 없었고, 컴퓨터 하나만 있으면 됐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프리랜서로도 전향이 가능했다. 한국의 특성상 모두 모아놓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경력과 경험이 많고 일정 지연 없는 신뢰성이 있다면 전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마드도 SNS나 블로그에 자랑하 듯 나온 것 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3년에서 5년차에서 많이 이직했다. 대부분 더 큰 회사로 이직하거나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중소규모 회사에서 프로젝트 경험을 쌓고 초급에서 벗어날 때쯤 카카오나 네이버 같은 회사에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즘은 초급인데도 경력이 3년차인데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서 인력을 수급할 때 초급은 웬만하면 배제했다. 인력 수급은 대부분 중급 이상으로 했다. 초급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 내부의 신입이나 초급 인력으로 배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방식은 불안정해 보였지만, 오히려 자유로웠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분야, 배우고 싶은 기술, 함께 일하고 싶은 팀. 선택권이 있었다. 물론 실력이 있어야 선택할 수 있었다. 실력이 없으면 선택당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다. 일정이 촉박할 때, 프로젝트가 꼬일 때, 밤을 새워야 할 때. 쇼핑몰 업체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날들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언제 소통해야 하는지, 언제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지, 언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어떻게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지 경험이 이끌었다.
부동산 회사에서 배운 계약서 검토 능력도 프로젝트를 선택할 때 도움이 됐다. 계약 조건을 꼼꼼히 보게 됐다. 급여 지급 조건, 일정 변경 시 대응 방안, 지체상금 조항. 3D 캐릭터 업체에서 급여를 못 받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 신중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두꺼운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녔던 20대. 급여도 못 받고, 회사가 망하고, 1주일 동안 집에 못 갔던 날들.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1년을 보내고, 프리랜서로 떠돌고, 부동산 회사에서 PPT를 만들다가 회계와 법무까지 맡았던 시간들. 인쇄 업체에서 경영기획을 하고,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여기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