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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부터 부동산까지, 방황의 궤적

처음부터 내길이다.

by jeromeNa

쇼핑몰 업체에서 입사 첫날부터 1주일 동안 집에 못 가고 2주일 만에 퇴사한 이야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1년을 보내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프리랜서로 뛰며 취업 사이트와 쇼핑몰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디자이너는 안 됐다는 이야기, 이후 카툰 업체로 갔다.


교육용 컷 만화였다. 출판사에서 교육용 책에 들어갈 컷 만화의 채색을 담당했다. 작가가 펜으로 완성하면 스캔 후 포토샵으로 채색을 입혀 전달하는 작업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만화 채색을 담당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여기서도 나중에 사이트를 구축해야 했다. 협력업체와 소통 문제로 퇴사를 해야 했다.


그러다 결혼했다. 프리랜서로 불안정하게 살 수는 없었다.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다. 지인의 소개로 이번에는 부동산 회사였다. IT도 디자인도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PPT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분양 자료, 제안서, 사업 계획서를 만드는 일. 드디어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홈페이지 구축 일이 들어왔다.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고, 분양 단지 소개 페이지를 만들었다. 익숙한 작업이었다. 그러다 또 "회계 한번 해보겠나?"라는 말과 함께 회계 업무가 추가됐다. 장부 정리, 수입과 지출 계산, 세금 확인.


차변과 대변, 재무제표, 손익계산서. 생소한 용어들이었지만 회계사를 귀찮게 하면서 배웠다. 숫자는 명확했다. 1원이라도 틀리면 안 됐다. 시간이 지나 법무까지 맡게 됐다. 계약서 검토, 등기 서류 준비, 등기부등본, 근저당권. 법률 용어는 어려웠지만 반복하니 익숙해졌다.


PPT 디자이너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경영까지 하고 있었다. 시키면 했다. 모르면 전문가를 찾아가 배웠다. 출장이 잦았고, 언제 집에 들어간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3년을 그렇게 일했다. 계약의 세계를 배웠고, 세무 처리도 배웠고, 장부 정리도 익혔다. 디자인이나 개발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식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맞는지 몰랐다. 그냥 했다. 나중에 IT 프로젝트를 할 때 계약서를 검토하게 됐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 세금 신고를 해야 했고, 회사를 차릴 때 등기 절차를 밟아야 했을 때서야 알았다. 부동산 회사에서 배운 게 다 쓰였다.


부동산 회사를 퇴사하자 거래처였던 인쇄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명함을 맡겼던 곳이었다. "우리 회사로 올 생각 없냐"는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경영기획이었다. 고객을 만날 일은 없었다. 사업 계획을 세우고, 매출을 분석하고,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일. 부동산 회사에서 배운 회계 지식이 여기서 쓰였다. 수치를 분석하고, 손익을 계산하고, 경영 자료를 만들고, 자동화 시스템을 기획하고 만들었다.


인쇄 업체를 나온 후에는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지인의 사무실 한 구석을 빌리고, 컴퓨터를 놓고,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사업자 등록을 하고 제대로 시작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거부했던 개발 공부에 매달렸다. 3개월 동안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집에 가지 않았다. 서비스를 개발하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버거운 길이었다. 가족이 있기에 돈은 벌어야 했다. 단기 강사 자리를 알아봤다.


3D 학원 강사, 교육원 강사, IT 학원 강사. 3D 모델링을 가르치고, 웹디자인과 HTML을 가르치고, 프로그래밍을 가르쳤다. 지금까지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일이었다. 강사로서 인정받았다.


강사 생활을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학생들에게 설명하려면 내가 정확히 알아야 했다. 모호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학력고사와 수능 때도 안 하던 공부를 더 많이 했다. 또한 강의 제안서를 작성하고 계획서를 작성하고,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부분, 이해를 못 하는 부분 등을 경험하면서 체계적인 일정을 작성하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강사로 계속 있을 생각은 없었다. 뭔가 부족했다. 직접 만들고 싶었다. 가르치는 것보다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시간제 업체 강의로 전환했다.


업체 강의를 하다 보니, 키오스크 개발 의뢰가 들어왔다. 전시관이나 박물관의 터치스크린과 적외선으로 움직임을 포착하는 인터렉티브 콘텐츠였다. 디자인과 개발이 합쳐진 일이었다. 인테리어 조감도 작업도 했다. 포토샵으로 평면도를 그리고, 3D로 모델링을 했다. 3D 기술 서적도 출판하고, 제품 디자인도 했다. 제품 패키지를 디자인하고, 라벨을 만들고, 설명서를 만들었다. 인쇄 업체에서 배운 지식이 도움이 됐다.


30대 중후반이 됐다. 받아들여야 했다. 디자이너는 안 되는구나. 억지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미 개발 경력이 쌓여 있었고, 개발 일을 더 많이 했고, 개발자와 개발 강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개발로 전향했다. 디자인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포트폴리오는 치웠다. 이제는 개발자였다.


돌이켜보면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3D 캐릭터 디자이너, 이벤트 캐릭터 디자이너, 웹디자이너, 쇼핑몰 이미지 작업, 카툰, 애니메이션, 프리랜서, PPT 디자이너, 부동산 회계, 부동산 법무, 인쇄 업체 경영기획, 3D 학원 강사, 교육원 강사, IT 학원 강사, 키오스크 개발, 인테리어 조감도, 제품 디자인. 이력서에는 몇 개월씩 짧게 일한 회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직이 잦다는 건 인정한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정착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산만하다"고 했다. "하나를 제대로 파야지"라는 말도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면접을 볼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웠다. "왜 이렇게 이직이 잦나요?" "왜 분야를 계속 바꿨나요?"


답하기 곤란했다. 계획적으로 이직한 게 아니었다. 회사가 망하거나, 급여가 밀리거나, 견디기 힘들어서 나온 거였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안 받아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한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변명처럼 들렸다.


방황이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디자인도 아니고 개발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양분이 되었다. 분야 간 이해가 넓어졌다. 경영자의 입장, 관리자의 입장, 디자이너의 입장, 개발자의 입장, 기획자의 고민, 회계 담당자가 왜 정확성을 요구하는지, 법무 담당자가 왜 까다로운지를 알았다. 프로젝트를 할 때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넓어졌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디자인만 보거나 개발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흐름을 볼 수 있었다. 계약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예산은 얼마인지, 가능한 일정인지, 개발은 구현 가능한지, 디자인 컨셉이 맞는지 보였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여러 회사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됐다. 일정 관리, 소통, 흐름의 이해. 급여가 밀리는 회사는 대부분 일정 관리가 안 됐고, 소통이 안 되는 회사는 일이 꼬였고, 전체를 모르고 자기 부분만 하면 문제가 생겼다.


방황의 시간에서 방향이 정해졌다. 처음부터 걷고 있던 길. 방황처럼 보였던 길.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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