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꺼운 포트폴리오와 서류 탈락

전공과 비전공의 벽

by jeromeNa

전산정보처리학을 전공했지만, 하고 싶었던 건 디자인이었다. 학교 수업은 수업대로 듣고, 디자인은 독학으로 익혔다. 강의실에서는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도서관에서는 디자인 이론을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전공과 관심사가 다르다는 게 문제일 줄은 몰랐다.


졸업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벽을 마주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과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예상 밖으로 멀었다. 실력을 떠나서, 서류에서 탈락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력서에 적힌 '전산정보처리학'이라는 글자가 디자이너 지원자에게는 독이 됐다.


공모전에 나가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1990년대 후반,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작업물을 USB에 담아 갈 수도 없었고, 이메일로 미리 보낼 수도 없었다. 면접 때마다 두꺼운 A4 파일을 들고 다녔다. 투명 파일철에 출력물을 끼워 넣은 그 포트폴리오는 무게만 몇 킬로그램은 되었을 것이다.


면접장에 가면 그 무거운 포트폴리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설명했다. "이 작업은 이런 컨셉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사용된 색상은..." 면접관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때로는 관심 있어 보이는 눈빛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형식적인 질문 몇 개를 던지고 끝이었다.


"전공이 전산정보처리학인데, 왜 디자인을 지원했나요?"


이 질문이 나오면 답이 없었다. 디자인이 좋아서, 공부했다고 말해봤자 "그래도 전공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서류에서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몇 달간 이력서를 넣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며, 탈락 통보를 받는 일이 반복됐다. 디자인 회사뿐 아니라 광고 대행사, 출판사, 작은 기획사까지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행운처럼 느껴졌다.


어렵게 면접을 보러 간 회사에서는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봐주기도 했다. "색감이 좋네요", "구성이 잘 됐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는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 비슷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 뒤에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가끔 연락이 오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출근하면 디자인 업무보다는 다른 일이 주어졌다. "일단 이것부터 해보고..."라는 말과 함께 개발 관련 업무가 떨어졌다. 전공이 전산정보처리학이니까 당연히 코딩도 할 줄 알 거라는 가정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프로그래밍 수업을 떠올렸다. C언어, 어셈블리어, 데이터베이스. 시험을 위해 외웠던 이론들은 이미 가물가물했다. 디자인 공부에 집중하느라 전공 수업은 그저 학점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 그래도 나름 중상위 정도였다. - 그런데 회사에서는 그 전공 지식을 요구했다.


"개발도 하고 디자인도 하면 좋잖아요."


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인건비도 아끼고 효율도 높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디자인만 하고 싶었다. 코드를 보는 게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결국 들어간 회사에서도 디자인보다는 개발 쪽 업무 비중이 컸다. 3D 캐릭터 디자인 업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3D 캐릭터를 웹에 올리는 작업, 그것을 구현하는 코드를 만지는 일이 더 많았다. 디자이너가 만든 결과물을 프로그래밍으로 구현하는 역할이었다.


두꺼운 포트폴리오는 서랍 속에 들어갔다. 면접을 다니며 들고 다녔던 그 파일은 더 이상 꺼낼 일이 없었다. 대신 모니터 앞에 앉아 코드를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개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게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류 탈락을 거듭하며 자존심도 상했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못한다는 좌절감도 컸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때 그 두꺼운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던 시간들도 헛되지 않았다. 디자인을 독학하며 배운 시각적 감각, 사용자 경험에 대한 고민, 화면 구성에 대한 이해는 나중에 개발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됐다. 화면 설계서를 볼 때, 사용자 입장에서 생각할 때, 디자이너와 소통할 때. 그 경험들은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다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서류에서 떨어질 때마다, 면접에서 "전공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두꺼운 포트폴리오를 들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