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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대신 받은 개발 업무

결국 개발자로

by jeromeNa

3D 캐릭터 디자인 업체는 3개월 만에 나왔다. 급여를 받지 못했다. 한 달이 밀리고, 두 달이 밀렸다. "다음 달에는 꼭 드릴게요"라는 말만 반복됐다. 작은 회사였고, 자금 사정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입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곳에서 3D 캐릭터를 웹에 구현하는 일을 다뤘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 한 일은 코드를 만지는 것이었다. 캐릭터가 웹에서 3D로 노출되게 만들고, 드래그하면 여러각도에서 보여지게 만드는 작업. 대학 때 독학으로 배운 VRML, HTML 지식이 여기서 쓰였다. 풀리지 않던 코드가 작동할 때 쾌감은 디자인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급여가 밀리는 상황에서 그 쾌감만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3개월째 월급이 나오지 않자 그만뒀다. 퇴사하면서도 밀린 돈을 받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에게 3개월 치 월급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받아낼 방법이 없었다.


다음에 들어간 곳은 이벤트 기획회사였다. 이번에는 캐릭터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드디어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다. 행사용 마스코트를 그리고, 홍보물에 들어갈 캐릭터를 만들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며 면접을 보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길로 온 것 같았다.


그런데 4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았다. 런칭한 이벤트 사업이 구설수에 오르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임원들은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초기에는 좋아하다 결국 문을 닫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월급은 받았다. 하지만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 이력서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IT 업체에 웹디자이너로 들어갔다. 웹사이트의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였다. 포토샵으로 레이아웃을 잡고, 색상을 정하고, 버튼과 아이콘을 디자인했다. 디자인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달이 지나자 업무가 바뀌기 시작했다. 포토샵으로 디자인한 화면을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실제로 보이게 만드는 일이 추가됐다. 디자이너가 만든 이미지를 슬라이스 도구로 잘라내고, 그걸 HTML 테이블 태그로 조립하는 작업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CSS로 레이아웃을 잡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포토샵으로 웹사이트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면, 그걸 격자 모양으로 잘라서 HTML 테이블에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여기서도 독학으로 공부한 HTML 지식이 도움이 됐다. 테이블 태그가 무엇인지, 이미지 경로를 어떻게 넣는지 알고 있었다. 완전히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이미지 크기를 1픽셀만 틀려도 레이아웃이 깨졌다. 테이블 셀 하나가 삐져나오면 전체가 무너졌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만 신경 쓰면 됐다. 다른 브라우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IE에서만 제대로 보이면 그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단순했다.


IT 업체에서 6개월쯤 일하며 이미지를 자르고 조립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디자인과 개발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완전한 디자이너도 아니고, 완전한 개발자도 아니었다. 애매한 위치였다.


다음에 들어간 곳은 쇼핑몰 업체였다. 면접 때는 디자인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입사하니 디자인은 외주 디자이너가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포토샵 파일을 받아서 이미지를 자르고, HTML로 조립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루에 100페이지를 만들어야 했다. 정확히는 100개의 미니 상점 페이지였다. 입사 첫날부터 작업량이 쏟아졌다. 밀려 있던 작업이 수백 개였다. "일단 이것부터 급한 거니까"라는 말과 함께 파일 목록이 전달됐다.


점심시간을 빼고 하루 8시간이면 480분. 100페이지를 만들려면 한 페이지당 5분도 안 되게 작업해야 했다.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찍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입사 첫날부터 밤을 새웠다. 100개를 다 못 끝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작업은 계속 쌓였고, 퇴근 시간은 없었다. 새벽까지 남아서 작업하고, 사무실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일을 했다.


그런 날이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집에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자고, 씻지도 못하고, 같은 옷을 입고 일했다. 슬라이스 도구를 클릭하고, 드래그하고, 저장하고. 테이블 태그를 입력하고, 이미지 경로를 복사하고, 붙여 넣고.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하루에 18시간은 넘었다.


손가락이 아팠다. 손목은 계속 욱신거렸다. 눈이 충혈됐다. 밥을 먹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중국집 음식을 책상에서 먹으며 계속 작업했다.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았다. 언제 잠을 잤는지,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작업은 계속 밀려 있었고, 똑같은 속도로 찍어내야 했다. 이건 아니었다.


2주일째 되던 날, 그만뒀다.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말했다. 한 달을 채우지도 못했다.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지만 상관없었다. 여기서 하루라도 더 있으면 몸이 망가질 것 같았다.


퇴사하고 집에 돌아와서 며칠 동안 잠만 잤다. 손목은 여전히 아팠고, 눈은 뻑뻑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푸석했다. 20대 중반인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개발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코드를 만진 것뿐이었다. 포토샵을 켜고,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고 싶었다. 그게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방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디자이너로는 받아주지 않고, 개발 일은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력서에는 몇 개월씩 짧게 일한 회사들만 나열되어 있었다. 경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기간들이었다.


결국 애니메이션 학원에 등록했다. 1년 과정이었다. 다시 학생이 됐다. 20대 중후반에 학원을 다니는 게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 이 당시 디자인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거의 학원은 없었다. -


학원에서 캐릭터를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스토리보드를 짰다. 공모전에 나갔다. 상을 받았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작품이 늘었다. 1년 전보다 실력도 늘었다. 이번에는 디자이너로 취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두꺼운 포트폴리오를 다시 들고 다녔다. 1년 동안 만든 작품들이 추가됐고,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었다. 이제는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이너는 되지 못했다. 면접은 봤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 뒤에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프리랜서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캐릭터 디자인 의뢰가 몇 개 들어왔다. 작은 회사의 마스코트, 소규모 행사 포스터.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하지만 캐릭터 디자인 일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었다. 한 달에 한두 건 정도 들어왔고, 금액도 적었다. 프리랜서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결국 다른 일도 받기 시작했다. 취업 사이트를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사이트 전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HTML로 페이지를 만들고, ASP로 기능을 만들고, 게시판을 붙이고, 회원 가입 기능을 넣어야 했다. 개발 일이었다.


쇼핑몰 사이트 제작 의뢰도 들어왔다. 상품을 등록하고, 장바구니를 만들고, 결제 페이지를 구성하는 일. 이것도 개발이었다. 프리랜서로 뛰었어도 결국 하는 일은 개발이었다.


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 손은 코드를 치고 있었다. 포토샵을 켜는 시간보다 개발 에디터를 켜는 시간이 더 많았다. 프리랜서가 됐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개발자였다.


3D 캐릭터 업체에서 급여도 못 받고, 이벤트 기획회사는 4개월 만에 망하고, 쇼핑몰에서는 입사하자마자 1주일 동안 집에 못 가고 2주일 만에 퇴사했다.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1년을 보내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프리랜서로 뛰었지만. 여전히 개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시간이 나중에 쓰일 거라는 걸. 3D 캐릭터를 웹에 구현하며 익힌 인터렉티브, 이미지를 자르고 조립하며 익힌 전문적인 HTML, CSS - 거의 최초의 퍼블리셔일 듯하다 -, 취업 사이트와 쇼핑몰을 만들며 터득한 개발 감각. 무의미해 보였던 경험들이 나중에는 다 쓰였다.


하지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왜 개발을 하고 있는지. 이 길의 흐름이 개발로 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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