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근처 바위에 홀로 앉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옷에 밴 나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양피지를 주머니에 넣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이끼가 손에 묻어났다. 축축한 감촉이었다.
방패를 든 사람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수풀이 더 우거져 있었다. 덩굴들이 서로 엉켜 있고, 가시덤불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체력이 없는 상태로는 무리였다.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나뭇가지를 짚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점점 숲이 얕아졌다. 나무 간격이 넓어지고 덤불이 줄어들었다. 나무 사이로 빛이 더 많이 들어왔다. 흙바닥에 햇살이 얼룩덜룩하게 떨어졌다.
한 걸음 걷고 나무에 손을 짚어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한 걸음. 멈춤. 숨. 천천히 나아갔다.
20분쯤 걸었을까. 아니,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시간 감각이 흐릿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나무 사이로 시야가 열렸다. 드디어 숲길이 끝났다.
바람에 실려 온 냄새에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구수한 빵 굽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낮은 언덕 너머로 나무 울타리가 둘러진 마을이 보였다. 지붕들은 회색빛 슬레이트로 덮여 있었고, 굴뚝에서 가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람이 빵 굽는 냄새를 더욱 진하게 실어왔다. 어디선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입구로 다가갈수록 묘한 소리가 들렸다.
푹. 둔탁한 폭발음.
치익. 불소리와 함께 뜨거운 공기가 퍼지는 소리.
그리고 활기찬 외침.
"이번엔 될 거야! 파이라!"
울타리 옆 빈터였다. 한 소녀가 연습 중이었다.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깨 위에서 탄력 있게 날렸다. 무릎까지 오는 연한 갈색 튜닉 위에 가죽조끼를 걸쳤다. 조끼의 버클들이 움직임에 따라 짤랑거렸다.
손끝에서 작은 불덩이가 생겼다. 주먹만 한 크기였다. 주황빛과 붉은빛이 섞인 색이었다. 공기가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앞으로 날아갔다.
처음엔 곧게 나아가는 듯했다. 3미터쯤 갔을 때 갑자기 위로 튀어 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듯이. 공중 5미터 높이에서 터져버렸다.
파팟.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사라졌다.
"아! 왜 또 이래!"
소녀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하지만 금세 손을 털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한 번 더! 파이라!"
'파이라.'
유성의 눈동자가 그 단어를 따라갔다. 숲에서 본 코드가 떠올랐다.
Ignis.orb() -> throw
그리고 지금 소녀가 외친 단어. 파이라. 실행 명령어였다.
두 번째 불덩이가 생겼다.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조금 더 컸다. 하지만 생성되자마자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땅에 부딪혔다.
툭. 풀들이 그을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은 금세 꺼졌다.
"으아아!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가까이 다가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였지만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소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뺨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등에는 그을린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옅은 갈색 화상 자국들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의욕적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양손을 비볐다.
"좋아, 이번엔 진짜 마지막! 파이라!"
세 번째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처음엔 주먹만 했다가 갑자기 탁구공만큼 작아졌다. 그러더니 다시 주먹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맥박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날아갔다.
나무로 만든 표적이 빈터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허수아비처럼 생긴 형태였다. 불덩이는 그 표적을 완전히 빗나가 오른쪽 울타리 기둥을 스쳤다.
치익. 나무 표면이 그을리며 얇은 연기가 올랐다.
"앗, 안 돼!"
소녀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손으로 기둥의 불씨를 탁탁 털어냈다. 손바닥이 까맣게 그을렸다. 다행히 불은 번지지 않았다.
"휴..."
소녀가 기둥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또 마나를 너무 많이 썼나? 아니면 적게 썼나? 아, 모르겠어!"
유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공중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렸다.
마나 조절 실패. 출력 불안정. 궤도 예측 불가. 전형적인 변수 제어 실패였다.
개발자로서 참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효율적인 코드를 보면 자동으로 최적화 방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저기요."
소녀가 휙 돌아봤다. 땀에 젖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흩날렸다. 갈색 눈동자가 유성을 향했다. 놀람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이었다.
"어? 누구세요?"
목소리에는 놀람보다 호기심이 더 많았다. 그녀는 유성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먼지 묻은 옷, 땀에 젖은 머리카락, 나뭇가지를 짚고 있는 손.
"아, 혹시 구경하고 계셨어요? 죄송해요, 시끄러웠죠?"
말은 사과였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반짝거렸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처럼.
"괜찮아요. 그보다 방금 외치신 게 불 마법 주문인가요?"
"네! 파이라예요!"
소녀가 갑자기 다가왔다. 한 걸음에 2미터는 좁혀졌다. 에너지가 넘쳤다.
"저 엘리나예요! 엘리나 로윈!"
밝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격식 있는 인사였지만 동작이 튕튕 뛰는 듯 탄력적이었다.
"화염 마법 수습생이에요. 근데 보시다시피..."
몸을 돌려 빈터를 가리켰다. 그을린 표적, 검게 탄 풀들, 연기 자국이 난 울타리 기둥.
"...잘 안 돼요. 빠른 시전은 자신 있는데, 마나 조절이 영 안 되네요."
양손을 모아 비비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맨날 '느껴라, 마나의 흐름을 느껴라' 이런 말만 하시는데, 대체 뭘 어떻게 느끼라는 건지!"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전혀 풀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 안 할 거예요! 언젠간 완벽한 파이라를 쏠 수 있을 거라고요!"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가죽조끼의 버클들이 찰랑거렸다.
유성은 그 에너지에 약간 압도되면서도, 문제점은 명확히 보였다.
"마나를 수치화해서 조절하면 될 것 같은데요."
"수치화요?"
엘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그게 뭔데요?"
"마나를 10이면 10, 5면 5. 정확한 숫자로 파악하고 사용하는 거예요."
유성의 눈동자가 공중의 한 점을 응시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구조도를 그렸다.
"지금은 감각에만 의존하니까 매번 다른 거고요."
"숫자로요? 마나를 숫자로 본다고요?"
엘리나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갈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다시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할 것 같은데요."
유성이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거친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손끝이 표면을 스치자, 그의 눈앞에만 반투명한 패널이 떴다.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같았다. 하지만 거기엔 자신의 코드만 있었다. 엘리나의 마법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나는 유성이 허공을 응시하는 것만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양피지가 그저 오래된 종이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 것은 어떻게 보지.'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것만 볼 수 있다면 의미가 없었다.
"저... 혹시 주문 구조를 볼 수 있을까요?"
"주문 구조요?"
엘리나가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천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고 낡은 수첩을 꺼냈다. 가죽 표지가 구석구석 닳아 있었다. 빼곡한 글씨로 영창문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어요! 마른 불씨여, 한 점으로 모여 타올라..."
수첩을 펼쳐 보여주었다. 손글씨였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에 여기저기 잉크가 번진 자국이 있었다.
유성은 수첩을 들여다봤다. 긴 문장들뿐이었다. 시처럼 보였다. 코드가 아니었다.
"이거 다 외워야 해요?"
"아니에요! 파이라는 초급 마법이라 '파이라'만 외치면 돼요."
엘리나가 수첩을 다시 접으며 말했다.
"이건 그냥... 선생님이 원리를 설명하신 거예요. 근데 전 원리를 알아도 제대로 안 돼요."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축 처졌다. 볼을 부풀렸다.
'접촉이 필요한가.'
유성은 숲에서 양피지를 만졌을 때를 떠올렸다. 직접 접촉했을 때 패널이 떴었다. 그렇다면.
"혹시... 손을 잡아도 될까요?"
"네?"
[계속]
** 디테일을 좀 더 추가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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