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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Jan 25. 2024

중구난방 우당탕탕 우리말 공부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제목: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

글쓴이: 이강룡

출판사: 도서출판 유유






출처: 교보문고



번역자를 위한? 또는 작가를 위한?


미국에서 번역을 하긴 했지만, 그건 한영 번역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한 번역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라도 영한 번역에 도전을 해 볼까 싶어 번역과 관련된 책을 몇 권 구입했다. 그중 첫 번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책에서 새로운 내용도 많이 배웠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번역가'를 위한 내용과 '작가'를 위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번역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두 가지를 모두 가르쳐 준다는 게 나쁜 건 아니다. 꼭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그 두 가지가 구분 없이 섞여 있다 보니 읽는 독자 입장에서 는 불편했다.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독자평에서는 번역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오히려 제목에 '번역가'를 넣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이 좋은 책을 못 읽는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그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나는 번역을 공부하고 싶어서 책을 펼쳤는데 다른 내용이 있네' 할 수도 있는 거다.


이건 편집에 좀 더 신경 썼다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서 아쉽다. 책을 '번역'에 중점을 둔 1부와 전반적인 '글쓰기'에 중점을 둔 2부, 이런 식으로 나눴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맛있는 파스타도 된장찌개를 주문한 사람 앞에 내놓으면 '이걸 누가 먹으라고!'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거니까.



번역의 기술


그럼에도 책에서 건진 번역 관련 내용은 꽤 알찼다. 그중 첫 번째는 단순히 단어만 보고 번역을 하면 오역을 하게 되니 문맥을 살펴야 한다는 것.


저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언을 예로 들었다.


Art is long, life is short.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흔히 인생은 짧고 덧없으나, 예술은 길이길이 남아 후대에 감동을 준다는 맥락으로 이 명언을 사용하는데. 저자는 이 글이 처음 등장한 텍스트와 문맥을 알려주며, 그것이 어째서 오역인지를 설명한다.


이 문장이 등장한 것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집이다. art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테크네(techne)인데 이는 '기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술가에게는 미술 테크네가, 작곡가에게는 작곡 테크네가, 그리고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에게는 의술 테크네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저 문장 뒤에는 의사라는 단어도 나오고 있으므로.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저 문장의 제대로 된 번역은 다음과 같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의술의 길은 먼데 인생은 짧도다.
-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잠언집의 첫 문장



이 외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좋은 조언들이 많았다.



글쓰기의 기술


아까도 말했지만, 번역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글쓰기에 대한 조언들도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누구나, 모두, 다들' 등의 표현을 함부로 쓰지 말고 '나는'이라고 적으라는 조언도 좋았다. 여타 글에서 쉽게 접해 보지 못했던 조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경험은 다들 한 번씩은 있으리라, 모두 그렇지 않은가'라는 표현을 꽤나 자주 썼다. 내 딴에는 상대의 호응과 공감을 유도하기 위해 적은 것인데,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모두가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쓰여 있는 글을 읽을 때면 속으로 '난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다. 그러면서도 편의성 때문에 혹은 그렇게 적는 게 더 매끄럽게 느껴져서 그런 표현을 남발했던 것 같다.


이 외에도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조언이 있었는데 특히 문장 부호 사용에 관한 조언이 도움이 많이 됐다. 여러 가지 조언들을 읽으면서 한 가지 엉뚱한 것을 깨달았다. 유시민 작가가 글을 얼마나 잘 쓰는가 하는 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전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었다.


이 책에서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고 조언하는 내용들이 그 책에서는 다 지켜지고 있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 역시 유시민 작가는 고수였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면도 있는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유행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저자와 나의 개인차일까. 나로서는 동의가 안 되는 주장도 있었다. 단어 하나의 뜻에 지나치게 천착해서 단어의 활용을 제한한다든가, 표어의 창의성보다 문장의 격을 더 중시한다든가, 자신이 지적한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다든가 하는.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허위 사실 유포'라는 표현은 '허위'가 정반대 뜻인 '사실'을 꾸미고 있으므로 '거짓 유포'라고 고쳐 써야 옳다. (p. 216)


이 책이 나온 10년 전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허위 사실'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데다가 공직선거법에 규정된 형사처벌조항에도 '허위사실공표죄'라는 항목이 있으므로 이 주장을 마냥 옳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음악에 도무지 소질이 없고 음악 지식도 별로 없는 나는 이 책을 준비하기 전까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이 말을 탄 도적 떼인 줄 알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어 본 일이 없는 나는 도서관 서가에서 <사자들>이 보일 때마다 사자처럼 용맹한 투사들을 떠올렸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여적 읽어 보지 않았는데 그 뜻을 알기 전에는 신통방통한 영웅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다 같은 한국어인데 왜 이리 어려운가. 독자가 헷갈릴 수 있는 여지를 번역자가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p. 163)


단어에 이렇게 민감한 저자가 이 책에서는 '대본'이라는 단어를 무려 스무 번이나 사용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대본(script)을 뜻하는 게 아니라 번역본과 대조되는 '원문' 혹은 '원서'라는 의미로 '대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 해서 어리둥절해 있던 나는 맥락을 통해서야 겨우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독자가 헷갈릴 수 있는 여지를' 저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대본'이라는 단어를 드라마 대본이 아닌 번역서의 '원문'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나? 10년 전에는 그 단어가 널리 쓰였나? 그쪽 업계 사람들은 '원문'보다 '대본'이라는 단어를 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도 펼쳤다.


외국 사람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습관처럼 괄호를 열고 원어를 병기하는 번역자들이 있는데 대부분 지면 낭비다. 독자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p. 377)


맞는 말이긴 한데. 전에 책을 읽다가 원어가 병기되지 않아서 원저자의 이름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독자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겠지만, 그 정보가 궁금했던 나는 며칠을 찾아 헤매야 했다.


이렇듯 책의 저자는 나와 생각이 다른 면도 많았다. 내가 유독 까탈스러운 독자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좋았다. 다만 번역이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번역과 관련된 내용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테고. '번역'에 관한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번역보다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많아 아쉽게 느껴질 수 있을 거다. 물론 두 분야에 대한 지식을 모두 얻게 돼서 좋아하는 독자도 분명 있으리라.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거른다 하더라도 '글쓰기'와 관련해서 얻을 건 많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선뜻 권하기가 애매한 책이었다.






내가 사랑한 문장



1.

좋은 대본을 고르는 일에 시간을 충분히 투자하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p. 25)


처음에는 드라마 대본(script)을 말하는 줄 알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으나, 곧 깨달았다. 아, 원문 혹은 원서를 뜻하는구나. 어쨌건 내용에는 동의한다. 애초에 좋은 원서를 번역하는 건 더 쉽고,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니까.


2.

맥락상 뭔가 부자연스럽거나 미심쩍을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자료를 찾아보는 성실함만 갖추면 된다. (p. 94)


번역하면서 진짜 중요하다고 느꼈던 점.


3.

노련한 궁사들은 바람이 세게 불면 표적지에 조준을 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각자 터득한 오조준을 한다. 엉뚱한 곳을 향해 쏘는 것 같지만 과녁에 명중시킨다. 번역자에게도 오조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일부러 오역을 감수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균형이 깨진 표현을 쓴다. 모두 의사소통을 잘하려는 한결같은 목적 때문이다. (p. 165)


4.

빼도 문장 뜻에 지장이 없으면 빼는 게 맞다.
...
원문이 그렇다 하여 번역문에서 기계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다. (p. 347)


번역하며 내가 주로 실수했던 부분이라 더 눈이 갔다.


5.

맥락과 어감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원문을 곧이곧대로 옮길 게 아니라 약간 다듬어도 괜찮다. (p. 388)


공감이 많이 갔던 문장.



* 전자책으로 읽은 관계로 종이판본과 페이지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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