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비밥'과 나.
'카우보이 비밥’의 세계관을 먼저 간단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2020년, 천재 프로그래머 아무개가 위상차 공간 게이트를 발명함. -> 통상 240배 정도의 속도로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져 화성이나 목성을 무슨 경기권 가듯이 갈 수 있게 됨. 우주적 ktx라고 생각해 보자. -> 언제나 그렇듯이 이 천재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저지른 발명품의 치명적인 실수를, 다 만들어지고 나서 그때 발견함. -> 매몰 비용을 포기할 수 없는 자본가들은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이로 인해 달이 파괴되는 사고 발생. -> 달의 파편이 지구 표면에 수시로 떨어지는 바람에 지구에 안전지대 없어짐. 전 인류의 타의적 보헤미안화. -> 국경이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범죄 천국이 시작됨.
2020년이라. 이 시리즈가 만들어진 시기가 98년도니까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은 20년 후엔 우주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주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죠. 하긴 나도 이 시리즈를 봤던 2004년 가을엔, 20년 후에 뭔가 나라는 사람이 엄청 어른이 돼서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삶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각설하고, 이야기는 위상차 게이트가 만들어진 시기로부터 48년이 지난 2068년, 시작된다. 그야말로 머나먼 미래다. 워낙 광대한 이야기인 만큼 키워드를 통해 오늘의 영업을, 아니 소개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카우보이. (잊지 않으셨죠? 이 시리즈의 제목은 ‘카우보이 비밥’!)
이 시리즈가 할리우드의 고전 장르 중 하나인 ‘서부극’의 우주 버전인 만큼 카우보이는 주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서부극 장르에서의 카우보이는 홀연히 나타나 나쁜 놈들을 때려잡고(정의를 바로 잡고) 홀연히 떠난다. 가끔 자신을 의지하는 아이나, 여자를 만나면 흔들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머물지 않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주인공 ‘스파이크’도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상금 사냥꾼이고, 동료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깊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카우보이들은 계절 감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오기를 부리는 건지 한여름에도 스웨이드 재질로 된 바지와 조끼를 껴입고 다니는데, 이에 반해 스파이크는 화성에서 태어난 미래인답게 네이비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다닌다. 그것도 스키니 핏으로. 185cm에 70kg(강동원이 186cm, 66kg이라고 하니 참고해서 상상해 보자)으로 신체적 스펙이 뛰어나서 옷 입는 재미를 느낄 법도 한데, 26부 동안 단벌이라는 것은 고전적 카우보이의 똥고집과 동일한 부분이라 볼 수 있겠다. 이제 무기를 보자. 카우보이는 당연히 총을 쓴다. 외로운 총잡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에서 왔다. 반면, 스파이크는 총을 포함한 모든 무기를 쓰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사용해 싸운다. 무려 이소룡의 ‘절권도’를 익힌 바, 몸놀림이 빠르고 현란하며 가끔 돌려차기 할 때 다리가 2미터까지 늘어난다는 소문이 있다.
비밥
왜 카우보이 ‘비밥’인가. 카우보이와 비밥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비밥 이를 기억하시나요.(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 글 중 ‘달밤의 소년 같은 쿨재즈’를 보시죠. 거기에 비밥이가 등장함.) 예측 불가한 썅마이웨이 천재 비밥이. 왠지… 고독해 보이는 비밥이. 30만 원 빌려 가서 아직 안 갚는 비밥이(십 년 만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왜 안 갚았냐고 물어보면 아, 내가 그랬었나 하면서 무심하게 머리를 긁적여 허파를 뒤빌 캐릭터다. 하지만 웬일인지 통장에 10억 넘게 있고 바로 50으로 갚아줘서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 그 비밥이). 그 비밥이의 성격을 극대화한 우주판 금쪽이가 ‘스파이크’다. 다만, 오은영 박사는 없다. 그러므로 스파이크는 질주하고, 휘젓고, 마음껏 뽐낸다. 오프닝 음악 ‘tank’를 듣다 보면 ‘스파이크’라는 캐릭터를 의인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신은 아마도 한 번쯤 이 음악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음악인지는 몰랐겠지만, 예능과 광고에 엄청 많이 소비되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나오는 음악들이 재즈를 골자로 하고 있다. 심지어 에피소드 1화 소행성 블루스에 나오는 카드 게임을 하는 노인 3인방은 이름이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다. 영화 곳곳에 나오는 음악적인 *이스터 에그를 즐기는 것도 재미 중 하나일 것.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은 브라질 뮤지션으로 보사노바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이스터 에그: 프로그램 내에서 장난을 친다는 뜻의 게임 용어.
올드 보이.
‘올드 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왜 올드 보이인고 하니, 나이는 들었지만 소년기에 겪은 충격적인 일 때문에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들, 스파이크, 페이 발렌타인(77살인데 신체 나이는 23살인 현상금 사냥꾼), 그리고 제트 블랙(스파이크가 소속되어 있는 비밥호의 선장)은 모두 올드 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사연은 여기에 다 쓸 수 없지만(엄마가 남 이야기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음) 셋 다 엄청 쿨한 ‘척’하고 있다는 것만 밝히겠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닿을 수 없는 과거에 있다. 아니다. 스파이크의 사연은 잠깐 설명해야겠다. 이 정서가 곧 카우보이 비밥의 정서이기 때문에. 위에서 스파이크를 너무 생각 없이 나대는 사람으로 설명한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이 남자가 매 사냥마다 자살을 시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죽자, 상관없으니까.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스파이크는 과거, 거대 마피아 조직 ‘레드 드레곤’의 에이스였다. 그 시기에도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용맹해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도, 얻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에 죽음에 초연해졌다고나 할까. 그는 소년의 미소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동료였던 비셔스의 애인 줄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그는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진다. 오래 동안 살아남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줄리아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한다. 하지만 이미 조직은 모든 사실을 알고 줄리아에게 그를 죽이라 지시한다. 스파이크는 그녀에게 오늘 밤 묘지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줄리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스파이크를 지키기 위해 조직을 등지고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스파이크는 이후로 그녀의 생사를 쫒으며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현실을 지낸다. 다시 그는 죽음에 초연해진다. 그녀가 없는 삶은 좀처럼 깨지 않는 꿈 속처럼 허무할 뿐이다. 동료들과 함께 현상범을 잡을 때는 마치 게임에서 미션을 완수하듯 날뛰지만, 밤이 되면 마음은 줄리아가 오지 않는, 그 날밤 묘지로 돌아간다. 복수할 대상도 없고, 그리운 사람의 생사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우진은 행복한 편이었다.
이우진: 유지태가 연기한 올드 보이의 등장인물로, 오대수(최민식)에게 복수하고 자살한다.
Adieu
1학년 2학기 가을. 영화 촬영 때문에 짜증이 날 정도로 바빴던 여름이 어느새 끝났고 갑자기 맑고 차가운 공기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좋아했던 친구(각설이 아님)에게 안녕을 고했다. 시간이 많이 생겼다. 오후 4~5시쯤 컨테이너에 들어가 카우보이 비밥을 보았다. 보고 나서 밖으로 나오면 전통예술원에서 연습하는 학생들의 단소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고, 일몰은 아름답고, 달의 파편은 결코 떨어질 리 없는 평온한 지구의 표면 위를 천천히 공을 들여 걸었다.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시 산책을 하고, 어두워질 때쯤 기숙사로 돌아와 컴퓨터실에서 과제를 하고, 룸메이트와 실없는 얘기를 하고 낮에 빌려 놓은 책을 읽다가 잠드는 생활. 하루하루 그리운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알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주접을 떨 수 있는 친구들도 많았고, 돌아갈 곳도 있었다(엄마가 있는 부산). 그런데도 마음은 괜스레 고독했다. 그 고독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때마다 나보다 더 고독한 누군가가 우주에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 됐다. 그 시기에 ‘카우보이 비밥’을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카우보이 비밥을 시작했는데(넷플릭스로. 실사판 아님 주의), 그때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부터 26부작 dvd를 소장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려웠던 것 같다. 예전만큼 재밌지 않을까 봐. 이제 더 이상 고독하지도, 시간이 많지도 않으므로. 이쯤에서 뜬금없이 깨달은 나의 특성 하나는 남자친구였던 사람과 친구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저 그 사람은, 그 시기에 두는 걸로.
스파이크도 줄리아를 다시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어쩌면.
마지막을 스포일러로 장식할 순 없으니 이쯤에서,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