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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Jan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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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우연이었다. 친구들과 건강 챙기자며 이런 저런 과제를 스스로 부여하다보니, 최소 주 3회는 운동을 하자며 운동 계를 결성했다. 우리끼리 정한 운동의 범위는 30분 이상의 웨이트 트레이닝 혹은 5km 이상의 달리기. 그리하여 날씨 좋은 여느 봄날 저녁 달리기나 한번 해볼까 싶어 운동화를 동여메고 집 밖에 나섰다. 달리기라는 걸 이렇게 각잡고 해본게 몇년만일까, 아마 군대 전역후에는 없었으니 족히 10년은 넘었을텐데. 마치 첫 걸음마를 떼던 그때처럼 모든게 생소했다. 5km라는 거리는 어느 정도인건지, 어느 정도로 뛰어야하는 건지 아무런 경험이 없었기에 선택한 것은 그저 냅다 달리는 일. 500m쯤 지났을까 심장이 터질듯 뛰기 시작하고 곧이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듯한 한걸음 한걸음을 참아낸 끝에 결국은 골인. 스마트폰을 통해 기록을 확인하고, 친구들에게 운동기록을 인증하고 나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오 나 잘뛰네?


5km 26분, 1km당 5분 12초 페이스.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3-4개월을 꾸준히 연습해 목표하는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절반의 우쭐함과 절반의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살면서 몸 쓰는 일이라곤 딱히 남보다 잘해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함이 앞섰지만 어찌됐든 기분은 좋았다. 내친김에 이런저런 러닝 정보를 찾아보니, 나는 러닝에 있어서만은 큰 재능을 타고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른바, 러닝 이코노미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 달리기 효율 같은 개념인데, 몸에 있는 에너지를 얼마나 온전히 앞으로 몸을 이동시키는데에만 쓸 수 있느냐에 대한 역학관계였다. 러닝 이코노미를 구성하는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키와 몸무게의 비율인데 공교롭게도 나는 딱 최적의 러닝 이코노미를 가진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애정을 가지고 키운 식물이 쭉쭉 자라나듯, 내 기록도 하루하루 좋아져만 갔다. 잘하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보면 더 잘하게 되는 선순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러닝에 진심이 되어 주 3-4회 틈틈히 집 주변을 달리고, 틈날때마다 러닝 커뮤니티, 유튜브들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어떻게하면 더 잘 뛸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주루룩 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새 러닝 신발 3켤레, 러닝용 스마트워치, 러닝용 이어폰을 가진 찐 러닝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5분 12초로 시작했던 페이스는 하루하루 조금씩 줄어들어 4분 20초 대에 진입했고, 이제 10km 이상 긴 거리를 달리는 것도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다. 올해 마지막 대회, 10km를 50분 안에 뛰어보겠다는 목표는 이미 한달 전에 초과 달성 한지 오래다. 내후년 정도면 42.195km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본다. 부차적으로는 삶이 정돈되고, 잠 못 이루는 밤이 줄어들어 조금 더 단순한 삶을 살게 된 것도 같다. 첫 러닝을 시작한게 불과 지난 7월이니, 그 짧은 새에 참 많은 것들이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언제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난 4개월 남짓 마치 불장난처럼 확 빠져들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급히 시들어버린데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침 겨울이 와 스스로에게 핑계대기 좋은 시절이 되어버렸고, 발바닥 부상까지 겹쳐 1-2주간은 뛰고 싶어도 뛰지 못하는 신세이기도하다. 그렇지만 간만에 찾아온 삶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상투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달리기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과 닮은 구석이 꽤나 많다. 한숨 한숨 내뱉기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보면 어느새 그 고통이 즐거움으로 변화되어 있기도 하고, 조금 더 먼 곳까지 달리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 상관 없이 나만의 페이스를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 달리기에서 중요한 건, 힘들더라도 그저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을 더 내딛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달리기도 내 하루하루도 끝이 있는 거니까. 어찌보면 뻔한 일이지만, 달리기는 그런 뻔한 사실을 내 온몸을 움직여 깨닫게하는 일련의 종교의식이기도 하다. 그저 이 종교가 내 삶에 계속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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