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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Feb 23. 2024

심쿵 얼큰 라면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한참 운동에 대한 열정이 울끈 불끈 샘솟는 남편과 외모에 특히나 멋지구리한 근육에 관심이 지대하신

사춘기의 막내는 이제부터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에 단백질 보충제를 먹겠노라고 선언했다

입안에서는 아니 왜? 굳이 왜? 우린 아침도 안 먹는데,, 그럼 하루 한 끼 먹자는 거잖아?

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관리가 절실해진 중년 남자와 하고 싶은 것이 확실한 틴에이저에게 응원은

못해줄 망정 차마 의지를 꺾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해서 우리 집 두 남정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그래 까짓것 해 보는 거야! 간헐적 단식도 하고 있는데 뭐!"


사실 말이나 왔으니 말이지 간헐적 단식도 16시간 공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사실 아침을 먹지 않을 뿐이었다.

공복 16시간이 되기도 전에 홀라당 점심을 먹고 무엇보다 아침을 건너뛴다는 보상 심리가 작용을 하는지 저녁은 또 푸지게 잘 먹었다.

그러니 공복 시간을 제법 철저히 지키던 남편만 감량에 성공했고 공복시간을 간헐 적으로만 지키던 나는 오히려 증량에 성공했다.

해서 ‘그래 이 기회에 나도 덕분에 살이 빠져 홀쭉해지면 좋잖아 !’라는 솔깃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우리가 저녁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 열띤 의견을 듣다 보니

그 타당성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정신없이 일하느라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아침 과는 다르게 저녁 시간은 길었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렇게 해서 하루 한 끼 점심만 먹고살자 하는 첫날은 식구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고 그 긴 시간을 버티기 힘드니 채소 한 접시를 먹자고 했다

꽃 보다 어여쁜 색의 빨강 피망과 방울토마토 그리고 푸릇푸릇 한 싱그런 오이 거기다 단맛이 오른 콜라비까지 썰어서 한 접시를 뚝딱 했다.

그러나 밤은 너무 길었다. 허전한 뱃속을 부여잡고 '아니여 이건 배가 고픈 게 아녀 맴이 허한겨 !'라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도 일분이 한 시간 같았다.


그다음 날은 야채 접시도 싫다 하는 우리 집 두남정네가 친절히 물에 풀어준 단백질 보충제를 저녁 대신 먹었다.

애기들 해열제 시럽 같은 달짝지근 씁스구리 한 맛도 맛이려니와 속이 너무 허전했다.

그 덕분에 며칠을 밤마다 화이트와인에 포도와 구수한 치즈를 썰어 놓고 먹었다.

다른 안주나 밥을 곁들인 것이 아니니 저녁은 걸렀고 최소한 저탄고지는 지키고 있다고 외치며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치즈에 지방뿐 아니라 와인과 포도 에도 당분이 많고 특히 와인 안에도 일정량의 칼로리가 포함되니 결국엔 고칼고지였다.

뒤엔쟝..

체중계 저울이 나를 비웃듯 며칠새 또 한눈금 올라가 있었다.


그러던 수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왕진도 없었고 남편은 학회 모임이 있어 오후에 세 시간가량 홀로 외출을 해야 했다.

나는 속으로 앗싸! 쾌재를 부르며 혼자만의 일탈을 꿈꿨다.

그전날 저녁 안 그래도 들적지근 맛대가리 없는 단백질 보조제만 물에 타서 먹고는 허전한 배를 부여잡고 있는데..


너튜브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캠핑 여행 프로그램이 문제였다.

여자들끼리 여행을 가서 야외에 텐트 치고 시끌벅적 캠핑을 하고 있는 모습도 즐거워 보였지만 끊임없이 나오는 먹거리가 문제였다.

불판에 치지직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도 침샘을 자극했지만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나던 꼬불꼬불 길게 늘어진 라면 면발에서 나는 그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는 맛 라면 우리 집 주방 서랍에도 종류별로 누워 계신 라면

다이어트에 최대 적 중에 하나인 라면..

그 라면이 먹고 싶어 밤잠을 설쳤다.

내 오늘은 기필코 라면 한 젓가락은 먹고 말 테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만든 하루 한 끼 먹기 챌린지에 푹 빠져 계신 부자에게 어떻게 이야기 한단 말인가..

주말도 아닌데.. 시작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치딩데이 하자고 하자니

영 체면이 안 서고.. 어떻게 할까? 어쩌지? 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우리 저녁 시간 전에 간식으로 라면 한 젓가락 할까?라고 이야기 했다가는

작심 몇 분이네 뭐네 하며 잘난 척을 할 테고 그 옆에 막내는 엄마 나 지금 근육 만들려면 다이어트해야 한다니까 라며 땍땍 거릴게 뻔하다.

이래저래 체면 구기지 않고 합법적?으로 라면을 먹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 했다


그런데..

남편은 오후에 학회를 가야 한다 하고 막내는 3층 형아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조금

하겠다고 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기막힌 타이밍

음하하하 오케이~! 집에 없는 남편도 꼭대기 층에서 문 닫고 친구들과 온라인상에서

만나 게임을 하고 있는 막내도 일층 주방에서 남몰래 끓이는 라면 냄새를 맡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작은 냄비에 물을 담아 인덕션 위에 올려 두었다. 아직 물이 끓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분이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어떤 라면을 넣고 끓여 먹어야 끝내줬다 소문이 날려나 혼자 행복한 고민을 하며 너튜브로 요즘 한창 재미나게 보고 있는 미스트롯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틀어 놓았다.

인터넷의 눈부신 발달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던 방송 프로그램들도 너튜브, 넷플, 등등 에서 볼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이야 를 외치며 주방 서랍을 열어젖혔다.

오디션에 나온 주자가 들고 나온 주현미 가수님의 정말 좋았네 라는 노래를 따라 열창하며

이안에 라면 있다! 는둥 때 지난 남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 쳐가며 혼자 킥킥거리면서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약 먹을 시간 됐나 보다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백화점에서 옷 고르듯  신중에 신중을 기해 라면 종류를 훑었다


어떻게 먹게 되는 라면인데... 기왕이면 기가 막힌 맛 나야 하지 않겠는가

불닭면, 신라면, 너구리, 짜파게티, 진라면, 순한 라면, 바지락 칼국수면 등등 다양한 종류 중에서 면발이 가늘고 쫄깃한 예전 한국 만화가게에서도 자주 먹어본 라면 안성탕면을 골랐다.

작은 냄비 안에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하고 라면 수프를 풀고 계란하나 탁 풀고 양파 반 개 파송송 썰어 넣고 면을 넣었다.

몇 분 되지 않아 근사한 냄새도 때깔도 끝내주는 얼큰한 라면이 완성되었다.

라면 특유의 향과 비주얼이 내 코와 눈을 자극했다.


한 그릇의 라면을 끓이기 위해 밤부터 내 뱃속은 그렇게 우렁차게 울었나 보다.

고춧가루도 살짝 얹어 얼큰한 국물에 새콤달콤한 노란 단무지까지 곁들인 라면은

그야말로 환상의 맛이었다.

마치 조선시대 신사임당 언니가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먹물에 담근 붓으로 심혈을 기울여 가지 하나하나 세심히 사군자를 치듯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조심조심 걷어 올린 라면 가닥을 세심히 입으로 흡입했다.

음.. 내 어찌 이맛을 잊고 살았던가...

그렇게 마지막 젓가락까지 최선을 다해 즐기며 먹었다.

우리집 멍뭉이 나리 처럼 두귀를 종긋 거리며

혹시나 3층에서 막내가 내려오려나..

남편이 돌아 올 때가 되었나 귀를 키우고는

말이다


갑자기 현관문에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 시간 넘게 걸릴 것이라며 학회를 다녀온다고 나간 남편이 두 시간도 안돼서

돌아왔다.

마음이 급했다 라면 냄새를 지우기는커녕 아직 식탁 위에 단무지 그릇도

치우 지를 못했다

빛의 속도로 창문을 열고 식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역덕 스레 남편에게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해가며 갔던 일에 대해 묻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이 울고 갈 연기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척 열연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저녁때가 다 되어 가니 뭔가 출출하지 않느냐며

집에 뭐 먹을 것 없느냐? 며 주방을 기웃거렸다.

나는 도둑이 제발이 저린다고 심쿵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자기하고 아들이 저녁 안 먹겠다 해서 아무것도 안 했지 먹을 것 없어"

라며 발뺌을 했다.

남편은 조금 허전한 듯 해 하더니 "그래 지금 먹어야 살만 찌지 안 먹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래도 이번에는 잘 버티네"

라며 소파와 한 몸이 되었다.

저녁 안 먹으려고 누운 게 분명한 남편을 보고 속으로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자기네가 하자고 한 하루 한 끼 먹기가 아니던가

하며 몰래 라면 혼자 끓여 먹은 것을 들키지 않은 것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다고 했던가

다음날 출근 하던 자동차 안에서였다.

남편이 물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라면을 신나게 끓여 드셨나?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떻게 알았어?" 해버렸다.

남편이 말했다 "아침에 커피 끓이려고 주방에 갔는데

인덕션 위에 작은 냄비가 있어서 치우려고 보니 그 안에 라면 있더라 "

그렇다 전날 남편이 예상 시간보다 빨리 돌아오는 바람에 먹고 난 라면 그릇 치우느라

냄비는 뚜껑 닫은 채 한옆에 치워 둔 체 잊어버리고 자러 갔던 거다.

덴쟝 남편은 아침마다 커피를 갈고 따듯한 물을 끓여 직접 브랜딩을 하는데

그걸 잊었다.


분명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치우는 습관을 가진 그의 눈에 라면 냄비를 사수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남편은 사건의 현장에서 뭔가 큰 것을 잡아챈 형사 아재처럼 눈이 가늘어져서는 말했다

"어쩐지 어제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하더라니.. 그새 라면을 드셨어요

계란까지 푸시고?"

그렇다, 남편이 잡은 증거품인 라면 끓인 냄비 안에는 어제 내 뱃속으로 환상의 맛을 내며 사라졌을 라면 중에 몇 가닥과 계란 흰자 조금이 현장의 빼박 증거처럼 냄비 바닥에

붙어 있었다

역시나 세상에는 완전범죄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생에 가장 스릴 있고 맛나게

먹었던 라면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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