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하옵소서
"우와 대단하다 깜짝 놀랐어"
라고 나는 감탄을 뿜어 대며 아는 척을 했고러닝 머신 위에서 뛰느라 얼굴이 발그레해진 친구는 숨을 몰아 쉬며 인사를 했다.
어느 화창한 주말이었다.
독일에서 귀하디 귀한 햇빛 쏟아지는 주말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야외로 나가느라 바쁘다
그런 날이면 동네 골목마다 자동차 주차 할 곳도 넘치고 헬스클럽 마저 널널 해지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좋다 못해 더운 여름날 같은 데도 헬스클럽에 유산소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어머 웬일이래~를 외치며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되도록 이면 맨 앞쪽도 아니고 뒤쪽도 아닌 중간 정도의 창문 가까이 있는 자리를 찾는다.
앞쪽은 출입문 근처라 오고 가는 사람들 소리로 시끄럽고 뒤에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다.
공기 청정기도 돌아가고 창문도 열려 있지만 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계속 움직여 대다 보니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한국에서 저녁 장사 한참 잘 되고 있는고깃집에 온 듯하다고나 할까?
독일 사람들은 운동 전후에 데오드란트를 향수처럼 칙칙 뿌려 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 계속 움직이다 보면 서로의 땀냄새와 향수 또는 데오냄새 그리고 섭취한 음식 냄새 등이 한데 뒤섞여 묘한 향을 만들어 내고는 한다.
보통은 남편과 중간쯤 어디에 나란히 놓여 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경사도를 12로 높여 놓고 주로 빨리 걷기를 한다.
마치 등산을 하는 것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또 서로 경쟁하듯 더 빨리 걷기도 하면서…
물론 사람들이 많아 나란히 있는 자리를 찾을 수가 없을 때는 여기저기 나뉘어
각자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서로 떨어져 운동을 하려니 잠깐이지만 조금 심심하기는 했다.
남편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지 유튜브를 듣는지 알 수 없으나
뭔가를 들으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귀에 뭔가를 넣는 걸 귀찮아하는 나는 멀뚱멀뚱 남들 운동하는 걸 이리저리 눈으로 감상하며 빠르게 걸었다.
바로 앞쪽에서 팔다리를 유난히 휘저으며 유산소 운동을 하면서도 앞쪽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뭔가를 찾으며 그 와중에 신문까지 한 장 한 장 읽으며 다 읽은 것은 바로 옆 바닥으로 떨어 뜨리는 묘기를 부리는 아저씨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저 나이에 저게 된다는 말이지? 싶었다
그야말로 멀티태스킹이 아닌가
운동 한 가지 하기도 버거운데 젊은 사람들 하듯 동시다발로 음악 들으며 신문 읽어 가며 운동도 하다니 말이다.
흰머리가 성성한 우리 또래로 보이는 남정네의 활기찬? 모습에 자극이 되어
걷는 속도를 조금 더 올리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왼쪽 맨 앞 출구에서 탈의실 가는 쪽에 있는 러닝머신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그러다 깜놀하고 만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그쪽을 노려 보듯이 쳐다보았다.
저 앞쪽에서 날다람쥐처럼 날래게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여인네는 분명 내가 아는 그 여인네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헬스클럽에서 만난 친구 올리비아다.
왜 아는 사람은 뒷모습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우리가 헬스클럽에 등록을 하고 다니기 시작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등록한
친구다.
나이도 비슷하고 원래 운동을 싫어하는 것도 그렇고 살을 빼고 근력을 키우겠다는 운동의 목적도 같아서 그녀와는
처음부터 말이 잘 통했다.
그녀는 며칠 되지 않은 사람답게 호기심 가득 여기저기 궁금해하며
물었고 나는 며칠? 먼저 시작했다고 아는 척 해대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녀의 소탈한 성격과 무엇 보다
서로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우리는 헬스클럽에서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고는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헬스클럽 안에 있는 사우나를 함께 하며 걸칠 것 없는 곳에서
태초의 모습으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개인적인 것 들을 나누면서부터는 그야말로 절친이 되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올리비아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 결혼을 일찍 했고 그 자녀들도
엄마처럼 일찍 결혼을 해서 손자 손녀가 벌써 넷이나 된다.
목요일은 그녀가 손자손녀들과 보내는 날이다.
요즘 그녀는 저녁으로 과일과 건과류를 섞은 그릭요구르트로 가볍게 먹는다.
그 덕분에 3킬로를 감량했다
이렇게 소소한 것들을 공유하다 보니 서로에 대해 제법 많은 것 들을 알게 되었다.
마치 어린 시절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매점도 같이 가고 화장실도
함께 다니던 짝꿍처럼 말이다.
그런데...
러닝 머신 위에서 날듯이 뛰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올리비아가 맞았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녀는 언제나 한결 같이 걷고 있었다.
그것도 러닝머신의 경사를 높여 두고 모니터 아래쪽에 달린 손잡이를 꼭 쥐고서
등반을 하듯 지금의 나처럼 분명 지난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걷고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옛날옛적 학교 다닐 때 시험 기간을 떠올리게 했다
왜 시험기간이면 그전날까지 공부 한 개도 못했다며 유난히 징징 대는
친구들 있지 않은가
그 말을 믿고 나도 공부한 게 없노라며 초치기 라도 해야 할 시간에 공부 안 한 거
서로 자랑 질 하다 시험지 받아 들고 오마이갓뜨 외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시험지 답 맞춰 보면 공부 한 개도 못했다고 징징 대던 친구의
점수가 훨씬 높게 나왔을 때..
그때 딱 이런 기분 이었던 것 같다.
묘한 질투와 배신감이 섞인듯한 얄딱꾸리 한 감정.
나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뛰기 시작한 거야? 너 계속 걸었잖아!"
올리비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왜 지난번에 너네 휴가 갔을 때 있잖아 여기도 그때 날씨가 너무 좋았었거든
그냥 왠지 한번 뛰어 봐도 될 것 같았어, 사실 언젠가 뛰어야지 뛰어야지 했었는데
그 언젠가가 그날이 된 거지 밖에서 동네 한 바퀴 뛰었는데
글쎄 그게 그렇게 상쾌하지 뭐야, 그다음부터 헬스클럽 와서도
뛰기 시작했는데 괜찮은 거 같아!"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변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해야지 하는 것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만 맘속 가득 품고 행동 하지 않으면 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엄지 척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은 게 뭐야 너 뒤에서 보니까 완전 잘 뛰더라 멋져~!"
러닝머신 위에서 40분도 넘게 뛰었다며 빨개진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친구를 보며 왠지 모르게 배가 살살 아파 왔다
그렇다!, 배는 사촌이 땅을 살 때만 아픈 게 아니었다
비슷하게 운동 못하던 친구가 갑자기 달라진 모습으로 뛰는 걸 봐도 아픈 거였다
젠장 가을에는 나도 뛰고 말 테다 러닝 머신위에서 가볍고 힘 있게
4분이 아니라 40분 멋지구리 하게 뛰고 말 테다
가을에는 달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