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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만 되면 도지는 병

by 김중희

이웃집 사과나무에 조롱조롱 달리던 초록의 사과 들이 어느새

빨갛고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고 있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뜨겁던 여름날 싱그러움을 가득 담아내며 신록이 우거지던 가로수 들도

갈색과 노란색을 섞어 담은 가을색으로 물들고 있다.


우리 동네 가로수 중에 가장 많은 도토리나무.

파랗게 달리던 도토리들이 갈색으로 익어 가며 바람 따라 우수수 떨어진다.

부지런히 나무들 사이를 오가던 다람쥐 머리 위로.. 지나가던 행인의

머리 위로.. 길바닥으로 툭툭 소리를 내며 내려온다.

이럴 때 독일에서는 도토리 비가 내린다고 한다.

갈색의 도토리 비가 내릴 때면 사람들은 이제 가을이 오려나 보다 한다.


이렇게 도토리 비를 맞으며 가을이 오려나 봐할 때 내겐 슬금슬금 도지는 병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일명 단발병이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고 인터넷 포털에

수시로 등장하는 패션 캡처 사진들 중에 유난히 단발머리에 눈이 가는 시기.

가을이 오려나 보다.



오랜 세월 긴 머리를 고집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손질하기가 편해서다.

짧은 머리는 때마다 잘라 주고 관리를 해 주어야 해서 미용실을 자주 가야 하지

않은가

예전에도 언급한 바 있으나 독일에서 미용실은 비쌀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란 독도에서 맛집 찾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다 보니 독일에서의 30년 세월 동안 미용실을 간 것은 손으로 꼽는다

물론 갈 때마다 새 역사를 쓰고 레젼드를 갱신하고 있다


그에 비해 긴 머리는 한국 다니러 갈 때까지 버티기가 수월하다

특히나 땀이 줄줄 흐르게 더운 여름에는 동그랗게 말아 올려 똥머리를 하던

질끈 묶던 하면 된다

친정 아버지를 닮아 내 머리는 짙은 갈색의 곧게 쫙쫙 뻗은 직모에 숱이 많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숱이 많이 편에 속한다.

그래서 한국의 미용실을 갈 때도 언제나 인사처럼 듣는 말이

"아유 숱이 진짜 많으시네요!"다


얇고 잘 부서지는 헐렁한 머릿결을 가진 독일 사람들 머리를 주로 만나게 되는

독일 미용사 헤어 디자이너 들은 일단 나의 풍성한 머리를 보고 감탄을 내 지른다

그 감탄사는 희비쌍곡선을 그리지만 말이다.

동양 사람들에 비해 얇고 잘 부서지는 머릿결을 가진 독일 사람들은

튼실하고 풍성한 머리숱을 늘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 풍성한 머리를 들고 일을 해야 하는 헤어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을 거다



언젠가 한번 또 이렇게 단발병이 도져 독일 미용실에서 비싼 돈 들여

자로 잰 듯한 똑 단발로 자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머리카락도 살이 찌는 건지 숱은 많으나 좀처럼 길어지지는 않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내가 미쳤는 가벼~!"를얼마나 읊어 댔던가...

거울에 비친 똑 단발은 7080 시절의 교복 입은 중학생을

떠올리게 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여기 클릭! 독일 미용실에서 머리 자른 후기)


좌우지당간 머리를 하러 다시 한국에 다녀올 수도 없는 이 시기에

갈색의 도토리가 익어 가는 소리가 또르륵 툭툭 들려오고 도토리 비가 내리는 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마음속에 단발병이 도지려 한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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