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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헬스장 탈의실에서 생긴 일

혹시 못 보셨어요?

by 김중희

수요일 늦은 오후였다. 모처럼 왕진도 없고 또 다른 스케줄 없이 오후가 통째로 비어 있던 날이다.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띵까띵까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남편과 운동을 갔다.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다 보면 눕고 싶을 테고 누워 있다 보면 평소 즐겨 보는 유튜브를 켜고 싶을 테고

그러다 보면 간식도 당길 테니 편안한 시간 보내려다 졸라 편해진 몸을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귀찮아 귀찮아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장 비싼 비타민이여!"를 외치며 다독였다.


운동 가방 들고 3층까지 계단을 이용해 씩씩 거리고 올라가 헬스장 문을 열어젖혔다.

헬스장 안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적어 보였다.

점심시간 지나 저녁 시간 되기 바로 전인 늦은 오후 시간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통 평일 아주 이른 아침 시간에는 출근 전에 운동하고 가는 직장인들이 많고

반대로 저녁 시간에는 퇴근한 직장인 들과 대학생 들로 붐빈다.

여유 있는 오전 시간에는 아이들 학교나 유치원 보낸 주부 들이나 퇴직한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이도저도 아닌 어중된 늦은 오후 시간은 틈새 시간인 셈이다.


평소 라면 자리 찾기 쉽지 않은 러닝머신을 비롯한 유산소 운동 코너도 한산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E-gym 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바퀴 돌고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조금 힘들지만 왠지 몸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편에게 역시 "운동을 해야 해!" 라며 "우리 틈만 나면 자주 오자"라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며 의기양양 탈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예전 탈의실 모습 before
길고 넓게 나뉘어 있어 사용하기 편했던 예전 탈의실 의자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숨어 있는 변수를 만나게 되기도 하지 않은가

텅 빈 샤워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씻고 나오자 좀 전까지 헐렁하던 탈의실 안이

장터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바로 전 요가 또는 필라테스 코스가 끝난 모양이었다. 오늘의 변수였다.

우리가 다니는 헬스장에는 회원 전용 무료 코스들이 많다.

문제는 코스가 회원들에게는 무료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거다.

아까 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탈의실 특히나 락커 앞 의자에는 발디들 틈 없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가방들로 빼곡했다.


지난해 헬스장은 탈의실 공사를 했다. 오래된 락커를 전체적으로 바꾸기 위함 이였다.

기존에 사용했던 원목 수납장은 마치 우리네 옛날옛적 공중목욕탕 락커를 연상케 할 만큼 연식이 있었고 숫자도 작아서 잘 안 보이고 열고 닫는데 문제도 많았다.

그에 비해 새로 만든 수납장은 번호도 크게 쓰여 있고 색도 세련된 검은색 이어서

모던한 느낌에 눈에도 훨씬 잘 들어왔다.

또 문을 열고 닫는 것도 터치로 되어 있어 편리했다.


그런데 세상만사 늘 그러하듯 장점이 있다면 단점 또한 있기 마련이 아니던가

물건들을 얹어 놓고 또는 앉아서 옷을 갈아입도록 마련된 의자가 훨씬 작고 짧아졌다.

예전에는 우리의 평상처럼 넓게 펴져 있던 의자였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 의자 위에 가방을 얹어 두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들기도 화장품을 꺼내기도 했다.


물을 뚝뚝 떨어 뜨리며 어떻게든 그사이에 락커에서 꺼낸 가방을 얹어 두려고 할 때였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처자가 덮어 놓고 내게 물었다

"혹시 못 보셨어요?" 나는 도무지 뭔 소리 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뭘요?"

그랬더니 한숨을 길게 내어 쉬며 " 제 핸드폰이요 핸드폰이 없어요!"

나는 아니 너의 핸드폰을 왜 내게 물어요?라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생겼고 어디다 뒀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을 들고 "요만하게 생긴 검은색이고요 아까 분명 들고 있었는데..."

새로워진 탈의실 수납장과 전보다 훨씬 작아진 의자 After

핸드폰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는 그녀의 난감한 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으나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많고 번잡한 통에 자기 핸드폰 찾는다고 여기저기 뒤적 대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가 분명 핸드폰이 좀 전까지 있었는데 없다며 울쌍이 되어서 핸드폰을 찾아 헤매고 있으니…

마치 그 순간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이 본의 아니게 용의자? 가 된 느낌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때 방금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감고 나온 중년의 처자가 내 옆을 파고들어 오더니 의자 위에 발을 올리고는 몸에 감고 있던 수건으로 발가락 마디마디의 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속으로 저런 지지한 것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지 않은가 지네 집에서나 하는 포즈로 남들도 함께 사용하는 의자에

족발?을 턱 하니 올려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발바닥까지 꼼꼼하게 닦아 내던 족발녀? 가 징징 거리는 핸드폰녀에게 말했다.

"그거 좀 들어 봐요?" 핸드폰 없다며 여기저기 뒤져 대던 그녀도 이게 뭔 일이래 싶어

옷 입다가 머리 말리다 얼음이 되었던 다른 이들도 뭐래니? 하는 눈빛으로

족발녀를 바라보았다.


못 알아듣는 것이 분명해 보이자 허리를 펴고 제대로 선 족발녀는 손가락으로 핸드폰녀의 가방을 가리키며

"그 가방 말이에요 그거 한번 들어 봐요!"

그러자 핸드폰녀는 무언가 홀린 듯이 족발녀가 시키는 대로 가방을 공중 부양 시켰다

그런데 그런데 세상에나

그렇게 찾아 헤매던 핸드폰이 거기 자빠져 있지 무언가...

그 순간 지저분해 보이던 족발녀가 새삼 스마트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핸드폰을 가방옆에 두고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가방을 이리저리 옮겼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그사이 핸드폰이 가방 밑으로 끼여 들어가고..

옷을 다 입고 집에 가려고 보니 핸드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된 거다.

이런, 업은애 찾는다는 말이 딱 이때 쓰일 말이 아니던가


모두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핸드폰을 다시 찾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족발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날렸다.

나도 족발녀에게 엄지 척을 해 주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형사 콜롬보처럼 그거 열어봐 했는데 나오지 않았느냐 말이다.

감사의 인사와 이어지는 박수 소리에 멋쩍어하던 족발녀가 말했다.

"왜 우리도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근처에 두고 아무리 찾아도 못 찾을 때 말이에요"

맞지 맞아 손뼉을 치며 여기저기서 나도 그래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럴 때 빠질 수 있나 깜빡하면 또 내가 아니던가

나는 "저는요 안경 머리 위에 꽂아 두고 한참 동안 안경 찾아 헤맨 적도 많아요"

여기저기서 책 속에 메모 넣어 두고 못 찾은 사람.. 열쇠 목에 걸어 두고 못 찾은 사람...

등등 깜빡했어 메들리가 연이어 이여졌다.

이름도 서로 모르는 낯선 이들 끼리 일상의 건망증 하나로 대동단결 되는 순간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녔어하는 묘한 위로가

탈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독일 헬스장 탈의실에서 생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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