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지가 스페인이 된 이유
스페인을 그 다음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내 예상 밖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서쪽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사계절 연중 기온이 따뜻한 곳이다. 그래서 여름 휴가가 지나고 가을 즈음이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묶어서 여행하려고 했다.
나에게 스페인은 쌀쌀한 날씨에 태양이 그리울 때 가려고 아껴둔 나라였다.
내가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여름에 스페인을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다음 여행지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택한 것은 순전히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누구냐고?
크흠. 먼저 목소리를 가다듬어보자.
그는 4년 째 프랑스에서 일하며 사는 한국 남자다.
나는 그를 남프랑스를 여행할 때 친하게 지낸 한 친구로 인해 알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나, 그리고 그 한국 남자 셋이서 함께 섬에 놀러갔다.
항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여행용 옷가지와 물품으로 두툼해진 배낭을 들고, 하와이안 바지에 프랑스 축구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와이안 스타일이라고 하면 매칭이 안될 것 같지만 바지의 메인색인 파란색이 티셔츠의 파란색과 통일감이 있고 잘 어울렸다. 센스있고 밝은 코디였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까만 피부, 쌍꺼풀 없는 동양적인 얼굴,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과 그리고 자주 해맑고 귀엽게 웃는 웃음을 짓고, 적당히 부드러운 얼굴을 가진…
딱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내 이상형의 남자와는 잘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끝이 안 좋거나, 잘 이어지지 않거나. 나는 깔끔한 한국 남자형 외모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나는 외모로서 인기는 없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너는 내 이상형이야, 라며 밖에서 번호를 물어온 것은 외국인 뿐이었다. 한마디로 포기다 이 말이야.
게다가 나는 더 이상 이상형이라는 것 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참 많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내 취향이긴 한데 딱히 설레진 않네.’ 하며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 날 섬에 있는 해변에서 수영을 했는데,
상의탈의를 한 채 구릿빛 피부의 복직근을 자랑하는 그가 옆에 누워있을 때도 그랬다.
‘운동을 참 열심히 했구나…’
그렇구나… 그냥 정말 진실 정보의 습득이랄까. 그만큼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가 당시에 다른 친구에게 관심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눈치 챙기자’ 생각하면서 최대한 편한 친구처럼 대했다. 수영을 하러 먼저 바다에 뛰어들때는 맞다 해변에 둘이 보내야하는데… 내가 바다를 너어무 좋아하는 걸! 하고 조금 미안한 마음도 느꼈었다.
그가 나에게 물안경을 굳이 빌려주겠다고 호의를 베풀 때에도(아 난 괜찮은데), 걸으며 계속 말을 걸 때도 나는 그저 내가 중간에서 심심할까봐 신경써 주는구나, 저런 배려심있는 녀석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래도 셋이서 해변에서 놀고 섬을 돌아다니면서 참 즐거웠던 여행이라는 기억은 남아있다.
정말 그 날이 프랑스 여행 중 몸과 마음이 가장 편안한 날이었다. 셋이 모험심을 가지고 섬을 구석구석 탐방하며 즐겁게 돌아다녔고, 해변은 투명하고 깨끗하고, 저녁까지 맛있어서 정말 유쾌했다. 그래, '유쾌하다'는 단어가 그 날의 여행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우리는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항구에 돌아와 항구 근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물 프리츠, 연어 타르타르, 그리고 크림 라비올리를 주문했고, 그는 프랑스식 홍합탕인 물과 국물을 아주 맛있게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뭐 해?’
‘감기 걸려서 계속 잠만 자고 있어…’
‘나도 감기 사일 째야. 약 먹어서 나아간다.’
‘생각해보니까 나도 감기 사일 째네 ㅠㅠ 숙소에서 약 준다고 할 때 먹을 걸’
‘나 곧 휴가인데 비탈 카드 만드는거 도와줄까?’
*비탈 카드 : 국민건강보험을 입증하는 카드로, 거주지를 가진 국민이나 비자소지자가 발급받을 수 있다. 카드를 소지하면 의료비용이 매우 저렴해진다.
그래서 나는 따로 연락이 왔을 때에도 프랑스에 살면서 많이 심심하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너 많이 심심하구나?
아니 나 안 심심한데.
하지만 내가 심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감기에 걸려서 밖은 잘 나가지 못하고 할 일은 없을 때, 연락을 하는데 대화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유머코드가 잘 맞아서다. 살짝 터프한 데가 있는 그의 성격도 매력있게 느껴졌다.
[TMI : 개그러버
이 세상에 유머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평소 다른 영역에서 남을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나에게 유일하게 이기고 싶은 것이 유머다. 나에게는 대화의 90% 이상을 농담으로 채우는 리동무 친구가 있다. 리동무와 얘기하다가 못 받아친 드립이 있으면 그날 밤에 자기 전에 생각하다가 분이 난다. ‘그 때 이렇게 개그를 쳤어야 하는데!’
나는 어릴 때도 가족여행 가서도 일요일이면 개그콘서트를 꼭 챙겨봤고, 성인이 되서는 유병재 채널을 시작으로 피식대학과 빠더너스까지 개그 영상들을 섭렵하는 편이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실, 너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
‘?....!! 나는 너가 그 친구한테 관심있는 줄 알았어.’
그렇게 오해도 풀고 총 한 달 남짓 연락을 이어왔던 것이다.
톡이 보이스톡으로, 보이스톡이 현지 전화번호로 나누는 통화로 바뀌었다.
몇 가지 특이 공통점도 있어서 반가웠다. 우리는 해산물을 위주로 먹는 채식주의자고, 비슷한 시기에 자퇴한 경험이 있었고, 그리고 비판을 많이 받았던 파리 올림픽 오프닝에 대한 더 너그러운 견해를 가졌다. 프랑스를 주제로 이야기할 것들도 더 많으니 이야기를 하기가 더 쉬웠다. 통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2시간이 쉽게 지나곤 해서 나는 곧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애가 참 씩씩하고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가 삶의 힘든 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살아가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그냥 외국에 오고, 안주하지 않고 그 후의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그랬다. 그는 바로 행동하고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스타일이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주어진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마 자라면서 내게 주어진 환경에 영향 받은 것이 많을 것이고, 또 다른 상황에서 자랐다면 아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밝은 표정과 미소 뒤에 있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가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대화가 잘 통하는 쪽은 지적인 사람들이지만 나는 신체마음형 남자에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행동이 빠르고, 마음을 잘 챙겨주는 그런 부류. 감성에 이끌리면 이성은 여지없이 녹다운 깃발을 흔든다.
스웨덴에서 연락을 이어오던 어느 날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친구는 곧 있으면 업무 때문에 몇 달은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랬다.
‘내가 정말 거기에 갔으면 좋겠어?’
‘응.’
단순하지만 솔직한 한 글자 대답이다.
나는 먼저 동유럽 위주로 여행을 더 하려고 했는데,
여행의 루트를 어떻게 바꿔야 하지? 그러면 포르투갈로 이동했다 또 비행기표 끊어서 동유럽으로 가야하나…
뭉게뭉게 올라오는 고민을 지우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 내가 거기로 갈게.’
나는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그 때 감정을 따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가는 지금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렇게 무턱대고 바르셀로나 행 티켓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