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어 수업]
*스포일러 있습니다.
코흐 대위의 삶을 알게 될수록, 어쩌면 이 자도 시대의 피해자일 뿐, 마음 깊은 곳에는 선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인 ‘질’과 둘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 속에 피어난 브로맨스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질’은 코흐와 한순간도 동등한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마음을 나누는 듯했지만, 이 관계는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코흐는 순종적인 듯 순종적이지 않은 ‘질’에게 점점 마음을 열지만, ‘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목숨을 건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빼앗기는 동안, 독일군인들은 연애질이나 하고, 질 낮은 가십을 퍼뜨리거나, 파티를 즐긴다. 이름 목록을 정리하는 단순한 업무도 ‘질’보다 질(?) 낮고, 누구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체계적으로 조직이 운영되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수직적이기만 한 모습이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페르시아어 수업은 그의 목숨을 살리는 구원이자, 폭력에의 저항수단이자, 죽어간 유대인들의 한명 한명의 이름을 코흐의 머릿속에 욱여넣은 복수였다.
일말의 스톡홀름 증후군 비스무리한 것도 허락하지 않음은 ‘질’의 해방이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룬 것임을 선명히 드러낸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