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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읽는sona Aug 05. 2020

극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1600


“부럽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 ~ 1610)의 <성 마태오의 소명>(1600)을 보고 처음 뱉은 말입니다. 물론 그림은 충분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주인공을 보고 부러워할 만한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얼핏 평범한 배경에 평범한 인물들 같습니다. 그 와중에 강력한 빛 한줄기를 직시하는 주인공은 그 순간 새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과거를 딛고 새로 태어나는 것. 그것이 나를 이다지도 부럽게 만들었습니다.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1600,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그림의 배경은 특이하게도 예수가 활동하던 기원전이 아닌, 17세기가 막 시작되는 로마의 한 선술집입니다. 술집에서는 대낮부터 작은 도박판이 벌어졌습니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 지긋한 사람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테이블에 모여 소소한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술집 앞을 지나가던 예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창 내기 중인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한 명을 지목하며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와 동행하던 베드로도 예수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도 예수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검지를 뻗습니다.



  도박에 열중하던 몇몇은 갑자기 쳐들어온 방해꾼들을 쳐다봅니다. 예수와 베드로가 그 무리 중 한 남자를 쳐다보며 가리키자, 그 남자는 자기를 불렀냐며 자신의 가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댑니다. 이를 확인하듯 왼편에 있는 예수와 베드로 머리 위에서 강렬한 빛이 떨어져 남자의 얼굴로 향합니다. 새로 태어날 시간임을 알리는 ‘신의 빛’이지요.





  주인공인 마태오는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예수가 살던 로마 시대에 세금징수원은 경멸받는 직업이었지요. 세금징수원들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정해진 금액은 국가에 내고, 나머지 수익은 자신이 차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개인사업자였지요. 세금징수원들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정해진 금액보다 많은 액수를 사람들에게 뜯어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작품 속 마태오는 일이 없는 날이면 술집에서 종종 도박도 했던 모양입니다. 카라바조는 배경을 이탈리아 로마로 바꾸고, 그림 속 인물들에게 당시 로마 옷을 입혀서 이 일이 마치 동시대에 일어난 것처럼 현장감을 부여했습니다. 중요한 인물인 예수와 베드로의 얼굴을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도박꾼들의 얼굴을 부각하여 사건 자체의 생생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예수가 부르는 사건을 통해 마태오의 죽음과 탄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의 오른손은 여전히 동전을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속세’와 ‘성스러움’이 교차하고 있으며, 신의 빛으로 인해 마태오는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예수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과 탄생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오른쪽에서 뻗어오는 강렬한 빛을 통해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는 미천한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신 걸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 9:13)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의인은 예수가 없어도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죄인은 깨달음이 필요한 사람으로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마태오를 불렀습니다. 그길로 마태오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선교 활동을 하였고, 4대 복음서 중 하나인 마태복음을 지었습니다.






  거룩한 존재의 부름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종교적인 내용은 뒤로하고, 우리 인생에서 그림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 삶을 이끌어줄 강력한 소명(召命)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요. 마태오를 비추는 저 빛은 신의 빛이자, 소명의 빛이기도 합니다. 소명이란 종교적으로 ‘신의 부르심을 받는 것’을 뜻하지만, ‘개인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최선의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살아야 나만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날이면 카라바조의 작품 속 마태오가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마태오는 성스러운 인물로부터 소명을 듣게 됩니다. 그가 착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나에게도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서 “너는 이걸 해야 해.”라고 시원하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미래로 직진할 텐데 말이지요.





  물론 나에게 마태오가 겪은 기적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바꾸어줄 강력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대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겠지요. 매일의 경험을 곱씹어보고, 나 자신과 대화하다 보면 마태오를 비추었던 것과 같은 강력한 빛이 서서히 생성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빛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겠지요. 극적인 순간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나날들이 모여 생성된다는 걸 이제는 알 나이니까요. 그러니 더는 부러워하지 말 것.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s://blog.naver.com/pshjuly13

인스타그램 : @sona_p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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