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읽는sona Aug 31. 2020

감각의 기억

모네, <양산 쓴 여인-마담 모네와 아들>, 1875



  기억은 감각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의 맛,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 연주회에서 들었던 감미로운 음색,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던 따스한 햇볕. 인간의 기억이란 사진처럼 선명하기보단 이처럼 단편적인 감각의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찍어 먹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때 ‘나’를 과거로 데리고 간 건, 홍차의 맑은 향과 과자의 부드러운 식감이었지요. 감각이라는 열쇠는 주인공에게 과거의 문을 하나씩 열어주며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 버립니다. 새로운 시간의 지평이 펼쳐진 것입니다.





  감각으로 인해 열리는 시간의 지평은 개인의 삶 속에서만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감각을 통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완전히 모르는 사람의 기억 속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하지만 예술은 말도 안 되는 걸 가능하게 해주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으로 보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예술이기도 하니까요. 감각으로 빚어진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한 사람의 기억 속으로 데려가 줍니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우리를 개인의 내밀한 기억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 속에 있는 것은 단어(개념)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하늘, 나무, 꽃이 아니라 화가가 본 순간의 유일한 하늘, 나무, 꽃입니다. 개별적 존재는 각기 특수한 시공간 속에 있기에 그것은 보편적 의미보단 감각에 좀 더 맞닿아 있습니다. 감각이란 순간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기에 개별적이고 특수하지요. 그 순간의 감각을 모네는 눈으로 포착해 시각화시켰습니다.



클로드 모네, <양산 든 여인-마담 모네와 그녀의 아들>, 1875,  웨싱턴 네셔널 갤러리



  <양산 든 여인-마담 모네와 그녀의 아들>(1875)이라는 작품 속, 눈이 시리도록 화창한 날, 모네는 가족과 야외로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싱그러운 초원이 펼쳐져 있고, 노란 꽃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언덕 위로 올라간 아내와 아들을 부르자, 그들이 화가를 향해 쳐다봅니다. 순간 바람이 불어오고, 아내의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이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립니다. 화면은 행복한 가정의 찬란한 한때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가족을 그린 그림’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화면 속에는 분명 모네의 아내인 카미유와 아들 장이 등장하고 있지만, 가족을 그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들의 이목구비, 차림새 등을 좀 더 명확하게 그려줘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인물들은 다소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걸까요?





  바람과 햇살. 이 그림은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내와 아들이라는 인물보다, 인물을 포함한 자연의 운동입니다. 인물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눈 부신 햇살과 가벼운 바람 안에 있습니다. 자연이 움직일 때면 그들도 덩달아 움직이게 됩니다. 인물들이 입은 하얀 옷은 햇빛과 구름의 그림자에 따라 색깔을 바꾸고, 들판의 꽃과 마담 모네의 모자 레이스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춥니다. 대기는 청량감으로 가득해 백 년도 더 된 그 날의 공기가 느껴질 정도이지요.



  화가가 눈으로 포착한 것은 정지된 풍경이 아닌 지금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자연입니다. 그 자연은 바람, 햇살이 되어 사물을 변화시키고, 감각을 자극합니다. 모네는 당시 느꼈던 감각을 고스란히 시각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단순히 ‘본다’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내밀한 기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찰나의 순간, 화가가 보았던 것, 느꼈던 것을 넘어 한 사람의 감각 자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 우리에게는 나를 뛰어넘어 타자라는 새로운 시간의 지평이 펼쳐집니다. 그림 속 풍경은 분명 다른 사람의 기억이지만, 마치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사건을 경험한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감각을 지각하는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사라지고, 서로 뒤섞이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감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나누고 분리하는 지성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모네가 보여주는 붓 터치도 이러한 감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심한 듯 툭툭 물감을 던져버린 듯한 표면은 가까이서 보면 매끈하기보단 거칩니다. 사물과 사물을 경계 짓는 윤곽선 따윈 없으며, 색과 색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이 순간적이듯, 모네의 터치도 순간의 물감 자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색깔들은 정교하게 섞이지 않고 제각각 자신의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조만만 떨어져서 보면 개별적으로 보이던 색채가 서로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색들은 서로 섞이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그 이미지는 선명하기보다 모네의 그림처럼 흐릿합니다. 감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듯, 개별적 붓 터치는 순간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라집니다. 결코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을 시각으로 표현하고, 그 결과를 우리가 보면서 한 사람의 기억을 되짚어 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마치 나의 추억처럼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한세기전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주체와 객체의 차이를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주체랄 것도, 객체랄 것도 없습니다. 마담 모네, 아들 장, 풀과 꽃, 바람과 햇살, 부드러운 드레스와 초록빛 양산. 그 어느 것도 주인공이 아니며, 조연도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의 감각적 운동 아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윽고 감상자마저 그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서 백오십 년 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접속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때의 공기, 햇살, 바람을 고스란히 느끼는, 확장된 시간을 경험합니다.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s://blog.naver.com/pshjuly13

인스타그램 : @sona_p713

이전 06화 투명한 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