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싱어 사전트, <개스드(Gassed, 독가스에 중독된)>, 1919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의 하루가 또다시 반복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집을 나섭니다. 퇴근 후 돌아와 잠깐 나만의 시간을 가지다 자야 할 때임을 깨닫고 침대로 들어갑니다. 인생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상은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의 반복인 듯합니다.
때로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좀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좀 더 새로운 일, 흥분되는 일을 찾아 떠돌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는 감흥도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기분 또한 일탈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지요. 유명한 철학자를 인용하지 않아도, 시시포스가 인간의 운명이란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지만, 다음 날이면 그 바위는 굴러떨어져 원래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질기고 질긴 일상입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일상은 계속됩니다.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개스드(Gassed, 독가스에 중독된)>(1919)에는 기묘한 행진이 화면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부상병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뒷사람은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너무 올리거나 비틀거리는 등 걸음걸이가 좀 어색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걸어가는 와중에 구역질을 느끼는지 토하고 있네요.
눈먼 자들이 일렬로 걸어가는 길에는 이들과 같이 눈에 붕대를 한 군인들이 아무렇게나 누워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얇은 로프가 땅에 고정된 거로 봐서 그쪽에 치료소가 있나 봅니다. 이들은 치료받기 위해 치료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고,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이미 치료를 받은 사람들인 걸까요? 전쟁의 광경은 참혹합니다.
작품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을 당한 영국군을 표현한 것입니다. 전쟁 초반 프랑스군이 최루가스 사용을 시작으로 각국은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잔인한 것이 독일군이 만든 겨자 가스(mustard gas)였습니다. 얼마나 맹독성인지 피부에 닿기만 해도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물집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눈에도 치명적이었기에 시각을 멀게 만들었지요. 독가스에 중독된 병사들은 며칠을 구토하고, 비몽사몽 하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림은 다친 병사들의 모습을 등신대로 보여줘 전쟁의 참상을 최대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이지만, 다시금 펼쳐질 일상의 모습 또한, 제시하고 있습니다. 눈먼 자들의 행진 뒤로 아주 조그맣게 축구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축구복까지 갖춰 입고, 공을 차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어가는 와중에 마치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지요. 전쟁이라는 비일상적 모습 뒤로 한가로운 일상이 보이면서 화면은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삶은 언젠가 일상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대조되는 풍경이 말해주는 듯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게 작품의 목적이라지만, 저 멀리서 공을 차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일상이란 얼마나 질긴 것인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그 풍경은 우리가 일상을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난다고 해도 곧 돌아올 것을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동료를 뒤로한 채, 한가로이 축구를 하는 사람들은 부상병들에게 구원의 이미지입니다. 동시에 나와 같이 일상을 따분해하는 관람자에겐 현실을 벗어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려주는 충고의 메세지입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란, 그 일상을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한 데서 기인한 건 아닐까요. 일상은 늘 똑같고,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편견에 어느샌가 스스로 동의해서 변화를 시도해보기는커녕 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는지. 늘 같은 곳에서, 같은 감정이 주는 안정감이 편안해서 벗어나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다가 새로움을 갈망하는 마음이 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이 실망스러워, 되려 일상을 지겨워 했던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러한 관람자에게 그림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도 일상은 계속되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곳도 결국 일상이고, 구원이 시작되는 곳도 일상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일탈하기 위해 이곳저곳 여행을 떠나고, 번화가를 의미 없이 쏘다니지만, 그때의 해방감이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니까요. 그것도 누군가(아마도 자본이겠지만)가 만들어놓은, 철저히 통제된 해방감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일탈도 예전 같지 않아지지요.
전쟁의 참혹함을 그린 그림에서 오히려 단단한 일상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시시포스가 인간의 운명이니 돌을 바위산으로 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왕 매일매일 올리는 거, 좀 더 몰입해서 올릴 수는 없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아요.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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