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반니 파올로 파니니, <근대 로마 풍경이 있는 회랑>, 1757
, <다비드>, 1623~1624
나의 여행 스타일은 단연코 ‘오래된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행 목적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을 보고 다들 한마디씩 합니다. “수학여행이나 현장학습이라도 가니?”
일정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하루에 미술관을 세 군데나 둘러보기도 합니다. 여행 스타일이 너무 뚜렷해서인지 늘 혼자 다닙니다. 기껏 여행 왔는데, 누가 온종일 미술관만 둘러보고 싶겠습니까? 나 빼고요.. 이런 나의 여행을 한마디로 하자면 단연코 현장학습, 좀 더 역사적인 단어로 말하자면 ‘그랜드 투어(grand tour)’입니다.
그랜드 투어는 17~19세기 유럽 귀족 자제들의 이탈리아 여행을 말합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중심지입니다. 당시 문화·예술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으로 여겨지기도 했지요. 18세기 이후, 화산재로 뒤덮인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본격적으로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꽃피기 시작했고, 유럽 상류층들 사이에서 고대 문명과 이탈리아에 관한 관심은 교양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들은 책으로 배우는 것을 넘어 직접 현장에 가기도 했는데, 이때 등장한 여행이 그랜드 투어입니다.
기차도, 비행기도, 구글맵도 없던 시절, 이탈리아로의 여행은 말 그대로 ‘그랜드'한 투어였습니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서 유적지를 둘러보고, 피렌체, 피사, 베네치아로 가서 르네상스 예술에 대해 공부합니다. 그리고 나폴리로 내려가 도시와 고대 유물을 살펴보고, 폼페이에서 발굴 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은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먼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도 큰일이었지만, 가정교사, 하인들을 대동하여,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일 년 이상이 걸리는 이 여행은 비용면에서도 ‘그랜드’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 사이에서 그랜드 투어는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요. 내 그랜드 투어와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과시할 부는커녕, 없는 부도 쪼개야 하며, 혼자서 모든 걸 해야 한다는 것 정도이려나요. 기본적인 여행 목적과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특별한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여행객들은 방문했던 장소가 그려진 그림, 조각, 공예, 책 등 각종 기념품을 사서 왔습니다. 나도 이들처럼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등을 방문하면 도록(책), 기념엽서, 마그넷 등을 꼭 삽니다. 집에 와서 그것들을 펼쳐 놓으면 그때 봤던 그림, 유물들이 금방 떠오르곤 하지요. 그러면 나의 방은 17~18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화가,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Giovanni Paolo Pannini, 1691~1765)의 작품 속 모습이 되곤 합니다.
파니니는 '베두타'라고 불리는 풍경화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베두타(veduta)는 이탈리아어로 풍경(view)을 뜻합니다. 그랜드 투어가 성행하던 시절과 맞물려서 여행객들은 기념품으로 이탈리아 도시나 유적지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샀고, 화가들은 이들의 요구에 맞춰 정교하고 섬세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베두타를 보면 그림이라기보다 ‘사진’에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관광객들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소유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파니니의 작품 중에서도 <근대 로마 풍경이 있는 회랑(이하 ‘근대 로마’>는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화가의 상상력이 들어간 재미난 그림입니다. 저처럼 그랜드 투어 형식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의 머릿속을 시각화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그림은 세로 172.1cm에 가로 233cm로 상당히 큰 사이즈입니다. 화면은 가운데 아치형 회랑을 중심으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빽빽하게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액자 속 그림을 보면 그 섬세함과 정교함에 한 번 더 놀라게 되는데, 이 그림들이 바로 베두타입니다. 액자 속에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로마 곳곳에 있는 실제 유적지와 유물들이 사진처럼 세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란 관광지는 그림 속에 다 들어가 있어서, 한눈에 로마를 둘러볼 수 있지요.
<근대 로마>는 1735년~1757년 로마 대사를 지낸 프랑스 외교관이자 장교인 스탱빌 공작(Etienne-François de Stainville, duc de Choiseul, 1719~1785)이 의뢰한 것입니다. 공작은 파니니의 후원자이기도 했지요. 그림 아래쪽 의자에 앉아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공작입니다. 그는 옆에 한 사람은 빨간 천을 걷어내고 있고, 몇몇은 책을 들고 있습니다. 앞쪽에는 미술품을 모사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네요. 선진 문화를 연구하는 당대의 모습일 겁니다.
작품은 <고대 로마 풍경이 있는 회랑(이하 ‘고대 로마’)과 한쌍인데, <고대 로마> 또한 <근대 로마>와 비슷한 구도입니다. 대신 콜로세움, 판테온, 각종 신전 등 고대 로마의 유적지와 유물이 빼곡하지요. 이 두 그림을 양쪽으로 펼쳐 놓으면 고대와 근대 로마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두 그림은 시공간적으로 로마 곳곳을 소유하고 싶은 공작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공작은 프랑스로 돌아가 자신의 집에 이 그림을 걸어놓고, 손님들이 오면 자신이 봤던 로마의 모습을 자랑스레 소개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베두타’를 보면 세상을 나누고, 분류해서 보관할 수 있다는 근대인들의 강박적인 소유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18~19세기에 유행했던 박물학이며, 이것은 백과사전과 박물관의 형태로 실생활에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현대 여행자의 입장에서 멋진 건축물, 유물, 박물관을 소유하진 못하니 병적으로 많은 사진을 찍게 됩니다. 또 여러 기념품을 사다 모으지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사진을 백업하고, 기념품은 잘 정리해서 보관합니다. 그랜트 투어의 끝은 늘 이렇게 박물학적인 정리와 보관으로 끝나곤 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내가 여행한 곳과 지식은 곧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 그러고 보면 나는 뼛속까지 근대인입니다. 파니니의 그림을 보면서 황홀해하는 것은 세상을 가지고자 하는 나의 욕망 또한 그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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