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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읽는sona Aug 07. 2020

환영받지 못한 요리

앙소르, <위험한 요리사들>, 1896


  글쓰기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소서(자기소개서)만큼은 싫습니다. 흔히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이 좋다고 합니다. 개인의 생각, 의견, 감정을 꾸밈없이, 담백하게 드러내는 글은 때때로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 내지요. 하지만, 자소서는 예외입니다. 자소서를 솔직하게 썼다가는 어김없이 서류탈락이라는 쓰라린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요.



  자소서를 쓰려고 인터넷에 있는 가이드라인과 샘플들을 뒤적거립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닌, ‘회사의 입장’에서 글을 쓰라고 조언이 나와 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자소서란 순수하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이 아닌, ‘회사가 원하는 인재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답하는, 취업이 목적인 글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회사가 좋아할 법한 사람으로 나를 포장해야 합니다.



  요리조리 뜯었다 붙여보기를 한참. 머리에서는 슬슬 열이 나기 시작하고, 써 내려간 글에서는 사회의 요구에 맞춰진 낯선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기소개서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도 이처럼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분해되는 게 너무나도 싫었나 봅니다. 작품에서 비평가들과 미술계 사람들은 악마, 사탄으로 등장해서 화가를 괴롭힙니다. 반면 앙소르는 고통받는 예수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종교화처럼 보이지만, 종교적 내용보다 현대인의 불안, 모순, 부조리 등이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내면의 감정,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주의 화가로 앙소르를 분류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거칠고 기괴합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가 감금된 방 한쪽에 걸려있던 해괴한 그림이 바로 앙소르의 <슬퍼하는 사람>(1892)입니다. 자세히 보면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가 보이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상하고 순수한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앙소르의 그림에 악평을 퍼부었고, 여러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은 거부당했습니다.



제임스 앙소르, <슬퍼하는 사람>, 1892



  <위험한 요리사들>(1896)에는 자신의 입맛대로 화가들을 요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앞쪽에는 두 명의 요리사가 있습니다. 왼쪽 요리사는 에드몽 피카르(Edmond Picard, 1836~1924)라는 당시 유명한 변호사이자, 벨기에 아방가르드 미술 단체인 ‘20인회(Les XX)’의 간행물과 예술서적을 출판했던 사람입니다. 오른쪽 요리사는 옥타브 마우스(Octave Maus, 1856~1919)역시 변호사이며 ‘20인회(Les XX)’의 사무 일과 매년 열리는 전시회를 담당했습니다. 둘 다 벨기에 아방가르드에서 중요한 인물들이었지요.



'20인회'는 1883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들어진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입니다. 거기에는 화가를 비롯해 조각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년 전시회를 계최하며 새롭고 신선한, 다른 말로 당대에는 낯설고 해괴한(?) 예술을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습니다. 20인회는 다른 나라의 작가를 초청해 함께 전시하기도 했는데, 초청자 중에서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고갱, 폴 세잔 그리고 반 고흐가 있습니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당시 비평가와 대중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임스 앙소르, <위험한 요리사들>, 1896


(좌) 에드몽 피카르, 변호사이자 예술서적 출판인 (우) 옥타브 마우스, 변호사, 20인회 사무 및 전시회 담당



  당시 상당히 파격적이었던 20인회의 작품은 비평가들에게 거센 비판 받았고, 특히나 단체의 주축이었던 앙소르에게 혹평이 집중되었습니다. 조직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로 인해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마우스의 주도로 1893년 단체는 해체됩니다. 3년 후, 앙소르는 그때를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요리되고 있는 인물들은 앙소르를 비롯해 당시의 20인회 맴버들입니다. 



  피카르는 프라이팬에 인상파 화가인 기욤 보겔스(Guillaume Vogels, 1836~1896)의 머리를 튀기고 있습니다. 머리는 바싹 익어 갈색으로 변했네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닭은 점묘법 화풍을 구사한 안나 보쉬(Anna Boch, 1848~1936)입니다. 바닥에도 20인회 소속 화가들의 머리가 뒹굴고 있습니다.



(좌) 화가 기욤 보겔스 (우) 화가 안나 보쉬



  마우스는 앙소르의 머리가 장식된 생선을 들고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려고 합니다. 앙소르 머리 위에는 ‘ART ENSOR’라는 푯말이 꽂혀 있는데, 청어요리를 뜻하는 프랑스어 ‘hareng saur’의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입니다. 예술가 앙소르는 청어요리가 되어 손님들에게 나가는 중입니다. 이처럼 ‘20인회’ 화가들은 기괴하게 요리되고 있습니다.



청어요리가 된 앙소르



  그림 뒤쪽으로는 당대 실존했던 비평가들이 앉아 있는데, 음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오른쪽 두 명은 토하기까지 하네요. 심지어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는 한 명은 옷에다 설사한 모양입니다. 결국 요리는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술을 주도해야 할 예술가들이 단체를 좌우하는 사람들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저 자신을 잃었습니다.



비평가들



  화면은 기괴함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시에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세상에 의해 조각조각 난 나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할 내가 세상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타인에 의해 요리되었다면, 나는 스스로 사회에 뛰어들기 위해 나를 포장한다는 것이 다른 점일까요. 그런 걸 제외하고 주체가 해체되었다는 것은 같지요.



  다행히 앙소르는 말년이 되어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70세가 넘어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고향인 벨기에 오스텐트에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존버’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앙소르는 존버하여 마침내 자신의 예술을 인정받았습니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과 함께 있는 자화상>, 1899



  그렇다면 나도 세상에 의해 조각난 모양이 아닌,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인정받을 순 없을까요? 단 하나의 방법이 떠오릅니다. 바로 ‘글쓰기’입니다. 자소서같은 비주체적 글쓰기가 아닌,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나의 생각, 느낌, 철학을 담은 글을 쓰는 겁니다. 진정한 나를 남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지만, 글이란 그 무엇보다 강한 전달력을 지닌 매체입니다. 인정보다는 ‘표현’에 집중하여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드러나고, 세상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s://blog.naver.com/pshjuly13

인스타그램 : @sona_p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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