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1650
no.7>, 1953
사람은 늘 특정한 이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모, 남편, 아내, 딸, 아들, 회사원, 학생 등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호칭을 통해 거기에 걸맞은 역할과 행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개인의 인생이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명사(名詞)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이름들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결정해 주지만,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을 뜻하진 않습니다. ‘나’는 사회적 호칭을 뛰어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에 몇 가지의 이름으로 가둘 순 없다는 걸,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명사들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면, 불쑥 짜증과 불만이 올라오기도 하지요. 존재의 무한함과 사회가 호명하는 이름의 유한함이 맞부딪치는 결과입니다. 나는 직장인이지만 직장인이기만은 한 건 아니며, 부모이지만 부모이기만은 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무한함과 사회적 역할의 유한함이 맞부딪히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는 교황이라는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통해 존재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가의 걸작 중 하나라 불리는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이지요.
그림은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더없이 강렬합니다. 핏빛 붉은 장막을 배경으로, 황금빛 테두리의 붉은 의자에, 광택이 나는 빨간색 케이프와 빨간 모자를 쓰고, 한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붉은 상의 밑으로 레이스로 장식된 하얀 예복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져 그림을 지배하는 긴장감을 조금 누그려 주고 있습니다.
화면은 새빨갛지만 단조롭지 않습니다. 질감의 특징을 기막히게 포착한 화가는 같은 붉은색이라도 모두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경의 빨간 장막은 상대적으로 차분하지만, 교황이 입은 케이프의 번들번들한 표면은 인물의 권력을 상기시켜주는 듯합니다. 각기 다른 붉은색의 특징만 보더라도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화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림을 결정적으로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물 그 자체입니다. 거대한 풍채의 한 남자가 위엄있게 앉아서 관람자를 쏘아보고 있습니다. 남자는 두툼한 코에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짜증인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고집이 세고, 깐깐할 것 같은 사람입니다.
흔히 교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후덕한 몸매에 인자한 미소를 하고, 새하얀 법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기에 그의 이미지는 곧바로 종교와 연결됩니다. 대중이 종교에 기대하는 안식, 평화, 선(善), 덕(德)을, 그는 존재 자체로 표현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는 ‘교황’이니까요.
하지만 벨라스케스 그림 속 교황은 우리가 기대하던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교황의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있을 뿐입니다. 스페인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1649년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중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완성된 그림을 보고 당시 교황이던 인노켄티우스 10세는 ‘너무 사실적’이라고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면에는 ‘교황’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덕목 대신, 한 개인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사회적 이름의 유한함을 비켜나가 존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75세의 인노켄티우스 10세는 대단한 정력가이자 수완가였다고 합니다. 또한 성마르고 격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친인척을 주요 요직에 임명하였고, 종교 권력의 축소를 우려하여 30년 전쟁 끝에 체결된 평화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폐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실제 교황은 고정관념 속 덕망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속 교황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개인의 무한함이 부딪힌 결과물입니다. 그의 몸은 규칙, 규율, 근엄함을 연기하고 있지만, 얼굴 근육 사이사이에서는 이러한 질서를 빠져나가는 욕망이 신경질적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이 결코 가둘 수 없는 존재가 육체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20세기 영국화가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이 초상화에서 육체 아래 뒤틀린 욕망을 발견하곤 1950년에서 1960년 사이 무려 45점이 넘는 교황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교황은 훨씬 더 잔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베이컨의 캔버스에는 사회적 인간과 거기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존재의 근원적 욕망이 발악하고 있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부여된 각종 ‘이름’은 세상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과 편견의 집합체일지도 모릅니다. 교황은 이래야 한다, 부모는 이래야 한다, 학생은 이래야 한다 등 호칭 속에는 역할이 규정되어 있고, 그 규정은 곧 존재를 한계 짖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요. 하지만 섣불리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은 너무나도 모험이기에, 그 순간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의 존재는 자신의 무한함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유한함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가 봅니다.
그러나 이게 다라고 생각한다면 작품은 이다지도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겠지요. 이 작품은 모순 속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생명의 유한성도 함께 보여줍니다. 교황 뒤 붉은 장막에 생긴 그림자는 마치 귀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권력의 꼭대기에 올라간 인간은 이제 더는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내려오는 길뿐이지요.
그러하니 그림 속에서 교황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욕망이 더욱 격하게 싸우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더 올라갈 일이 없는 그에게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규율과 욕망이 부딪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것이란 걸, 붉은 커튼 위로 서 있는 검은 그림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해 보이는 이 초상화는 세월이 흘러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보나 봅니다.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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