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38~1444
만약 인간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물과 운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무수한 개념(일반적이고 보편적 지식)이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온갖 종류의 사전을 보면, 카오스(chaos, 만물발생 이전의 원초적 상태, 혼돈)를 코스모스(cosmos,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로 정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이처럼 인간은 세상 모든 사물과 운동에 의미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개념, 단어, 숫자 등 인간은 지성으로 만들어 낸 온갖 도구들 덕분에 좀 더 편리하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자신감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시기가 르네상스(Renaissance)입니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억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시기입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만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입니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회화에서 원근법적 시선이 있었지만, 이것을 체계적으로, 수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든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입니다. 그는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으로 옮기기는 건축 도면을 만들기 위해 원근법을 활용했지요.
화가 마사초(Masaccio, 1401~1428)를 필두로 화가들 사이에서도 원근법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 화가는 들뜬 나머지 잠도 잊고 원근법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1475)입니다. 그가 연구한 원근법 그림을 보면 마치 컴퓨터 그래픽을 보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혼란스러운 감각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지성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았기에 화가가 그린 사물은 비인간적, 기계적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합니다.
우첼로는 자신이 연구한 원근법을 곧바로 회화에 적용했는데, <산 로마노 전투>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원근법으로 정돈한 작품입니다.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이 전쟁화는 인간이 어떻게 원근법을 적용해 카오스에는 코스모스를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산 로마노 전투>는 세 개의 대형그림으로 이루어진 연작입니다. 그림은 1423년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절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적으로 르네상스가 피어나고 있었지만, 도시 국가들은 쉴 틈 없이 서로 싸웠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전투도 그 수많은 전쟁 중 하나이지요.
세 개의 그림에서도 <산 로마노 전투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는 세계를 파악하는 인간 지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굉장히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잔인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전쟁이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우첼로의 전쟁화는 우리의 생각을 살짝 비껴갑니다.
그림의 주인공인 ‘니콜로 다 톨렌티노’로 보이는 사람이 중앙에서 백마를 타고 군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싸울 태세를 갖춘 창을 든 피렌체 병사들이 보입니다. 화면 오른쪽에서는 이미 피렌체 군과 시에나 군이 한창 싸우고 있네요. 바닥에는 온갖 부서진 창, 투구, 갑옷 등 장비들이 떨어져 있고, 말의 발밑으로 쓰러진 시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분명 ‘전쟁’을 보여주고 있지만, 화면은 이상하리만치 ‘정적’입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그림 정중앙을 기준으로 배경이 주된 상단부와 좀 더 복잡한 하단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단의 화면 앞쪽 인물들과 말은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상단 배경의 길과 사람들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어서 전경과 후경의 거리가 확실히 느껴집니다. 멀리 있는 건 작게, 가까이 있는 건 크게 그리는 원근법의 기본 원리가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가까이 있는 사물이나 멀리 있는 사물이나 모두 명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 멀리 위쪽으로 뻗어 올라가는 길마저 선명하게 보입니다. 멀리 있는 물체는 공기의 작용으로 채도가 감소하고 흐릿하게 보이는데, 이 그림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우첼로가 활동했던 시절에는 아직 선 원근법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르네상스인들이 바라던 세계는 모든 것이 선명한 세상이지 않았을까요? 즉 지성을 통해 만물을 파악하고, 그것을 개념화하기 원했던 마음이, 그림에서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표현하게끔 만들진 않았을까요? 따라서 그림을 이루는 공간과 사물은 모두 인간 지성의 작동 결과인, ‘개념(보편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창 전쟁 중인 하단부는 다소 어지러워 보이지만, 바닥의 물체들이 자세히 보면 이상하게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규환인 상황에서 물체들이 어째서 한 방향을 향해 ‘놓여’ 있는 것일까요? 바닥의 직선을 그어보면 그림의 소실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백마의 검은 눈동자로 모여듭니다. 그러니까 백마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공간과 사물이 배치된 것이지요. 수학적이고 질서정연한 세계를 바랬던 르네상스인들의 열명이 강박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신 중심의 세계였던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가 되면서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인간중심의 문화란 결국 인간 지성임을, 과도할 정도로 원근법에 매여있는 우첼로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산 로마노 전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시대가 추구했던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수학적으로 질서 잡힌 세계’이지요.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감각보다, 변하지 않는 근원적 원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화가가 그린 세상은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인간이 만든 법칙 아래 종속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 법칙은 가장 이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야말로 시공간과 감각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 즉 원리이고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는 코스모스 세계의 개화이며 그 세계는 이후로도 거침없이 쭉 뻗어갑니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박송화/그림읽는sona
그림 보기를 넘어 다양한 각도로 읽어봅니다.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예술을 통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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