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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13 제주 봄


3,5

서울에 다녀갔던 엄마가 돌아오고 봄이 오니 밥상에 먹을거리가 풍족하다. 

조그만 텃밭에 겨우내 먹었어도 무가 아직도 많이 남았고, 쑥과 봄동이 자랐다. 그리고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스스로 자란 갓이며 당근이 씩씩하게 컸다. 

달래 무침에 쑥국을 해 먹고, 봄동을 그냥 된장에만 찍어 먹어도 입안에 봄이 한가득이다. 며칠 내로 냉이도 캐러 갈 참이다. 겨울 동안 서울 추위와는 달리 기온은 높아도 줄곧 날이 흐려서 잔뜩 움츠리고 동면하듯 집에서만 지냈는데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이제 좀 걷기 시작하니 살 것 같다. 

겨울 동안 잔뜩 사둔 책들은 어쩌면 좋을까 싶지만 당분간은 봄이 오는 것을 단단히 지켜봐야겠다. 

-어제는 집을 나와 걷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길에서 뭔가를 열심히 뜯고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유채꽃의 새순을 그냥도 따서 먹으면 맛있다고 일러주셨다. 유채꽃도 따러 가야겠다. 




봄인 줄 알았더니 다시 추워서 속았다 싶었는데, 영등할머니가 온다는 영등달이 지나니 거짓말같이 진짜 봄이 되었다. 고양이들도 봄을 데리고 오는지 햇볕이 따끈하니 월양이, 월순이가 마당에 누워 배를 드러내고 골골 거리고, 창고 지붕에서 낮잠을 잔다. 월양이는 이제 부쩍 자라서 월순이랑 크기가 비슷하다. 밥 먹는 등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더니 골격이 커진 게 느껴진다. 나만 보면 가랑가랑 소리를 내서 궁금해서 친한 언니에게 물어봤더니 고양이들이 매우 기분이 좋은 신호란다. 아직 손타는 걸 조심하고 있지만 슬쩍슬쩍 내 몸에 자기 몸을 비비는 게 연애하듯 사랑스럽다. 

밭에 조화 같던 동백나무에 동백꽃이 활짝 피고, 사방에 유채꽃이 널렸다. 엄마의 배추에도 유채꽃 친척같이 생긴 배추꽃이 활짝 폈다. 농담처럼 배추를 화초로 키우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이 되었다. 

마음먹고 유채꽃을 보러 산방산으로 향했다. 유채꽃이 한창인 주말이라 관광객들의 소란과 봄기운으로 나른하다. 산방산 랜드의 바이킹을 타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과 유채꽃 밭에 삼삼오오 뭉쳐진 사람들, 카메라를 들고 허둥대는 연인들. 그 틈을 타고 우리도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고 산방산에 올랐다. 겨우내 온천을 하러 여러 번 가긴 했어도 산방산에는 처음 올라보았다. 화산 지형에 감탄하며 산방굴쯤 오르니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서서 낙수를 바라보는데 바위틈으로 자란 나무 한 그루가 가만 보니 우리 집 마당의 이름 모를 나무다. 집주인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똑 부러진 대답을 듣지 못해서 궁금한 채로 십 개월을 보냈는데 이제야 알게 된 나무 이름은 천선과나무였다. 

포도알같이 작은 열매를 슬쩍 따먹어보니 무화과 맛이 났는데 신선들이 먹는 열매로 알려져 있단다. 화산지형의 가파른 산방산 바위틈에 자라난 천선과나무를 보면 과연 신선들이 먹었겠다 싶지만, 우리 집 마당에선 월양이 놀이터인 나무가 그런 거라고는 집주인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유채꽃을 보러는 갔지만 온통 유료로 사진을 찍는 곳이어서- 왠지 거주민이 그런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될 것 같고, 우리 동네도 흔하디 흔한 것이 유채꽃이라 사진은 찍지 않고 봄바람만 실컷 쐬고 돌아왔다. 

대신 다음 날 남편이 유채꽃을 꺾어와 화병을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장실에 갈 때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뒤뜰의 유채꽃을 밭 할머니께서 잡초와 함께 몽땅 뽑아버리신 후였다. 


4,5

벚꽃 구경을 하러 장전리에 다녀왔다. 요란 벅적한 마을 축제여서 벚꽃 나무 아래서 막걸리 마실 계획은 물리고 고개를 들고 벚꽃만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벚꽃을 보면서 제주 고사리는 벚꽃이 필 때와 지는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는데 며칠 내로 근처에서 고사리를 찾으러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잠을 자는데 동네 할머니께서 문을 두드리셔서 나가보니 당장 양파를 걷으러 가자신다. 모자를 눌러쓰고 잠이 깨지 않아 어리둥절한 채로 쫒아 갔더니 양파밭에 양파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양파 수확이 끝난 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워 가라는 얘기는 들었어서 언제 한번 가봐야지 했는데 얼결에 오늘이 그날이 되었다. 

우리끼리면 아무거나 크고 실해 보이는 걸 주워왔을 텐데 할머니들과 오길 다행인 게, 길게 싹이 난 양파는 먹을 게 없다고 줍지 말라고 일러주셨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이 싹이 나서 농사를 망친 양파밭이라 양파가 지천으로 널렸던 거다.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 쪼그리고 앉아 싹이 없는 것으로 골라서 포대에 담았더니 한 시간쯤 만에 세 포대를 채웠다. 전 같았으면 열개쯤 줍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을 텐데 지난번 할머니를 따라 간 양배추밭에서 주워온 양배추를 알차게 잘 먹어서 할머니께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양파를 쓸어 담았다. 

내일 볕이 좋을 때 바짝 말려서 오래 두고 먹을 참이다. 할머니께서 너네 고사리는 먹었냐. 미역은 땄냐 물으시더니 아무것도 못 주워 먹는 우리가 안타까우신지 내일 아침에 고사리를 따러 가자신다. 

서울에서는 벚꽃만 기다렸는데, 제주의 4월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대로 먹을 것이 생기는 배부른 달이다. 

양파를 가득 실어 집에 오는 길에 올해 처음 제비도 봤다. 고사리 장마로 비가 잦은 4월이래도 봄은 봄이다. 


4,17

엄마는 이제 이석증이 많이 사라저서 양파며 고사리를 걷으러 다니며 기운을 차려간다. 

고사리가 많은 곳은 가족 간에도 안 알려 준다더니 정말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양할머니께서 집 근처 고사리 많은 곳을 알려주셔서 아침에 양할머니를 따라나선 엄마와 남편이 잔뜩 따왔다. 남편은 할머니께 일 못한다며 혼나면서 따고 엄마는 고사리를 원래 먹지 않는데도 욕심내어 따왔다. 낚시가 비수기인 4월에 남편은 이것저것 캐먹고 따먹고 주워 먹는 재미가 쏠쏠한가 보다.  

어제 비가 많이 왔으니 비 온 뒤 다시 쑥쑥 자란다는 고사리를 따러 내일 아침엔 셋이 한번 가보려고 한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 봄에 활짝 피는 꽃눈처럼 개구리처럼 제비처럼 우리들도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다. 






4, 18

아침에 고사리를 따왔다. 고사리를 수확하려면 천 번을 절해야 된다더니 정말 바짝 서있으면 눈에 띄지 않던 고사리가 쪼그리고 앉으면 다소곳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똑똑 따며 발길을 옮기다 보면 방향 감각이 사라진다. 

신기하게도 가시덤불 사이에 특히 많고, 한번 따고 지난 길에 다시 가 보면 또 있다. 먼저 사람들이 따가서 똑 끊긴 고사리 줄기를 보니 왜 가족에게도 안 알려준다는 줄 알겠다. 

엄마는 고사리는 먹지도 않으면서 어디 실컷 좀 따 보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하루 종일도 할 것 같다. 

수풀 사이를 쪼그리고 앉아 가시덤불을 헤치다 집에 왔더니 노곤해져서 한나절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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