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수다스러운 아이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앞뒤가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는 똑 부러지게 말한다. 그 조그만 입에서 파키케팔로 사우루스, 안킬로사우루스 등 발음도 어려운 긴긴 공룡 이름들을 줄줄 읊는 것이 신기하다.
요즘에는 낚시놀이에 관심을 가지며 백상어, 망치상어, 오징어, 복어 등 바닷속 친구들에 빠져 산다. 이상하게도 일반적인 동물들(이를테면 코끼리, 사자, 토끼 등은 통 관심이 없다.
동물을 편향적으로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숲 속 친구들이 좋아? 아니면 바닷속 친구들이 좋아?”
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런데 주저하지 않고 아이는 “숲 속 친구들!”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너무 의외의 대답이었다. 곤충이나 심지어 노루를 봐도 시큰둥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도대체 숲 속 친구들 누굴 말하는 것인가?
“숲 속 친구들 누구누구 있는데?”하며 물음을 던졌더니 아이는 엄마가 왜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한 말투로 힘주어 대답한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깔깔 웃어넘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하긴, 우리도 숲 속 동물이다.
잊고 살지만 우리 또한 커다란 생태계 안의 한 구성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특별한 존재라고만 생각할 때가 많다.
숲을 찾은 손님들 중에는 혹시 뱀이 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다. 그럴 때면 “혹시 뱀 무서워하시나요? 선생님께서 뱀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뱀이 선생님을 더 무서워해요.”라고 답변을 한다. 8년 전 숲 해설을 할 때는 일주일에 두세 번 뱀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달에 한번 보기가 힘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동물들이 지나다니니 뱀들이 서식처를 안 쪽 숲으로 옮겨 간 것이다.
식물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다들 의아해한다. 초피나무는 건드리기 전에는 향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툭 하고 뜯으면 독특하고 싸한 향을 풍기기 시작한다. 그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애벌레들이 잎들을 뜯어먹으면 방어기제로 향을 풍긴다. 곤충들이 싫어하는 향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선 비린내 없애는 데 좋다고 추어탕이나 자리물회에 띄어서 먹는다. 로즈마리 같은 허브도 마찬가지다. 허브의 향을 맡을 때 몇 번 문지르고 쓰다듬는다. 우리는 좋아하는 향이지만 모기들은 싫어한다고 하지 않는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풍기는 향조차 인간은 차를 끓이고, 식재료로 쓰고, 마사지 오일을 만들며 알차게 사용한다.
호주에서 들리는 산불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자연재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재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구 상 800만 종의 동식물 가운데 100만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소비가 계속되는 한 숲은, 우리의 자연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이처럼 우리는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도 숲 속 친구들이자 하나의 동물이며, 지구별 친구들이라는 것을.
숲에서 만난 생명 – 빨강 열매의 먼나무
서귀포를 지날 때마다 길가의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가로수 “먼나무”를 볼 수 있다. 보통 겨울에 푸르른 잎이 떨어지면 나무는 허전해 보이는데, 먼나무만큼은 잎이 조금 떨어진 후 빨간 열매가 도드라질 때가 더욱 예쁘다.
숲 관련한 강의를 듣다가 우리가 보는 길가의 먼나무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부적인 사항까지는 기억을 못 하지만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먼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나뉘어 있는데 암나무에서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 열매가 열린다. 하지만 어릴 때에는 암수 구분이 힘들다. 조경업자들 입장에서는 애쓰게 오랜 시간 키웠는데 자라고 보니 수나무면 조경수로의 가치가 떨어지기에 어릴 적에 나무들을 잘라서 암나무 가지를 접목시켜서 키우는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암나무도 암나무로, 수나무도 수나무로 만드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어여쁜 먼나무 열매를 바라볼 때 슬픈 감정이 함께 올라온다. 사람들 보기 좋자고 우리는 새로운 식물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듬어버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