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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한다는 서사

by 최우주

사람들은 서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길 바라면서도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

서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정된 상태에서 책이나 스크린을 통해 빚어지는 불행한 상황을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초등학교 때 일이 떠올랐다. 4학년쯤이었을까, 선생님께서 반의 모든 학생들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마음에 와닿지 않은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눈만 감으면 맹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감되지 않았다.

배우는 매우 부러운 직업이었다. 연기할 뿐이지 실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니까. 언제든 컷! 소리가 나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가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심신이 나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주변인들은 선의의 위로를 던진다.

“다 잘될 거야.”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니 언젠가는 회복될 거야.”

“내 눈이라도 줄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위로의 한마디이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의 위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내가 이 서사를 “불가역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빈 위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설명하겠지만, 현재까지 이 서사에서는 실명을 피한 사람이 많지 않다.

운이 좋아서 늦게 발병하게 되면 죽는 순간에도 약간의 시력은 유지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찍 발병하게 되면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되돌릴 수 없다고 되뇌는 순간부터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감에 빠지게 된다.


눈이 멀고 나면 체념하고 눈이 보일 때보다 더 많은 지혜를 얻었다고 말하거나

내면이 성숙해졌다고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장애인들에게 극복이라는 서사를 말하지 말라고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보니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2023년 여름, 이화여대 이지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아래와 같은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장애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바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눈을 사용하지 못하고 관절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장애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환경 안에서의 장애물들, 즉 편견이나 차별을 장애로 보느냐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그런 환경을 극복했다면 장애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소위 ‘인간 승리’의 스토리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죠.

따라서 우리도 장애 극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나쁜 일을 당하지만 그 안에서도 좋은 일, 긍정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극복이라는 단어는 그런 상황에서 삶을 놓지 않았고

던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이지선 교수는 그때의 사고를 당했고, 지금은 헤어졌다고 한다.

만났을 때 끔찍하게 싫은 것도 있었지만, 헤어짐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순응하고 적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혹은 잘 지내자고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이 책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당당하게 극복하고 무언가를 해냈다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치고받는 과정에서 화해하고 그 맞잡은 손으로 함께 걸어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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