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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ug 07. 2023

피라미 1/3

상상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해서 사람은 미련해진다.


예기치 않은 죽음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고독사한 주민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러주는 공무원이었다. 그는 죽음을 직업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늘 죽음을 경계했다. 차가 하나도 없는 도로를 건널 때조차 좌우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죽음은, 그가 처음으로 방심한 순간에 허무하게 그를 덮쳤다.


나 또한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이 아닌, 나를 오늘까지 살아있게 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삶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살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만 살고 싶다’는 끔찍한 바람이 그만 버릇이 되어 머리에 굳은살처럼 박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정말로 계획하거나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고 싶을 때 자살 대신 선택한 일은 주로 방구석에 누워서 비참한 기분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정말로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슬픔이라면 충분히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여기면서. 견딜 수 없이 슬플 때에는 이상하게도 팔이나 손가락이 함께 아파왔다. 몸속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터널이 뚫린 느낌이었다. 어느 날부터 가늘고 날카롭게 저미는 통증이 처음에는 갈비뼈 아래에서, 다음에는 오른팔에,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른손 약지 마디마디 끝까지 벼락처럼 뻗쳐와서는 지진처럼 머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육체와 정신이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그런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라면 그런 진리는 평생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하나의 통증을 공유한다는 감각은, 이렇게 괴로워하다 보면 정말로 더 빨리 죽을 수 있을 거라는 미약한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틴 셈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죽지 못해서 산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비굴하게 인생의 끝을 갈망하던 시기에, 무수한 상상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칼로 긋거나, 목을 매거나, 달리는 차에 뛰어들거나, 창틀이나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종지부에는 그런 나를 누군가가 발견하게 만들었다. 어떤 순간에는 응급실에 실려가다가 숨이 끊어졌고, 어떤 순간에는 창백한 얼굴로 팔목에 링거를 꽂은 채 달갑지 않은 병문안을 견뎌야 했고, 또 어떤 순간에는 내 영정사진 앞에 서서 차례대로 흰 꽃을 내려놓은 뒤 검은 상복을 입은 나의 가족들과 맞절을 하는 검은 옷의 친구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은 내 죽음을 비난하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나의 자살을 두고 나약한 선택이라며 혀를 찰 거라는 상상에 다다르자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화가 치밀었다. 그런 족속들에게 내 죽음을 안주거리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무기력하게 관에 누워있던 나는 어느 순간 분노에 휩싸인 채 그 피라미들의 대가리를 잔인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몇 번씩 일부러 그 피라미들을 상상했다. 그러면 그 밤을 버틸 분노와 오기가 생겼다. 사실 버틴다기보다는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뿌옇게 끓여서 없애버리는 것에 가까웠다. 의식의 밑바닥에서 그것들이 펄떡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보안등, 방범창, 실내온도 조절기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인해 더러운 비늘들이 쉴 새 없이 반짝거렸고, 그 가운데에서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 시기의 나라는 인간은 살기는 싫은데 차마 죽을 용기는 없어서, 죽기 싫은 이유를 만들고 그 이유 사이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 시간을 죽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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