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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ug 07. 2023

피라미 3/3

상상 속에서 자살한 나를 두고 조롱하는 피라미. 그 피라미를 거울 속에서도 본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너머에 존재하는 자살자들을 힐난했지만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도 모진 생각을 한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이 자살 사고에 시달리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실수로 상처가 될 말을 했지만, 나는 그냥 다른 사람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뒷전이다. 어릴 적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친척 어른이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가 깨어났는데, 자초지종을 듣고 그것이 확실한 방법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 친척에 대해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나는 그런 시도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나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중심에는 아버지 같은 근성이 있다.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경제적 불안을 딛고 서 있었다.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갑자기 이사를 갔다.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집이 망했나 보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는, 터무니없이 작은 집이었다. 의기소침해 보이는 부모님을 위로하기 위해 얼마 되지 않는 집의 끝과 끝으로 뛰어다니며 방에서 방까지 금방 갈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했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이 그런 나를 따라 같이 뛰어다녔다. 그때 엄마아빠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을 나는 부모가 되지 않고서는 영영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계속 안 좋아지기만 했다. 어느 날은 그 좁은 집의 변변치도 않은 가구와 가전 뒤편에 모조리 붉은색 압류 딱지가 붙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낮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때 집에는 동생과 동생 친구만 있었다. 그걸로도 끝나지 않아서 우편함에는 두툼하고 묵직한 서류 봉투들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날아들었다. 분명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은 위압적인 느낌의 것들이었음에도 식탁 한편에 조심스레 올려두면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가 늘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박박 찢어 한 움큼의 종이 쪼가리로 만들어 버리던 것을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때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자 밤늦게 부모님이 돈 문제로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와 혼자 한참을 숨죽여 울었고, 그렇게 얼마 동안을 우울하게 보내다 학원에 가게 된 첫날 김밥 한 줄에 심하게 체했던 것 또한 기억한다. 그 학교에는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자꾸만 늘어갔지만, 두 분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 비해서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간혹 먹고 싶은 게 있어도 그냥 참고, 마트에서 제일 저렴한 생리대를 사는 것과 같은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주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금전적 한계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름한 반지하 월세방에서 어찌어찌 서울대 미대에 갔다.


대학생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나는 필요나 절박함 보다는 선택과 호기로 새롭고 다양한 경험들을 내 젊음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쉽게 말해서 더더욱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원동력에는 단지 돈이 넘치지만 않았을 뿐 늘 대체로 내 뜻을 지지해 주었던 가정의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원하는 시점에 미술학원에 갈 수 있었고,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늦은 시간에도 어머니가 차려주는 야식을 먹을 수 있었고, 새벽까지 모자란 공부를 하느라 잠이 부족해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도 동생이 깨워주었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아침을 받아먹으며 아버지 차를 얻어 타고 등교할 수 있었다.


이름난 대학에 들어가니 학벌 그 자체가 도움이 되었고, 주변에 똑똑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름난 회사에 들어가니 더 많아졌다. 삶을 뜻대로 일궈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좋은 환경, 그 환경에 만족하며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나.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원하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인생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간혹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때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의지를 불태우면서 더욱 규칙적으로 살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괜찮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할 일을 더 미리 하고, 더 많이 했다. 나의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미숙함 또는 나처럼 미숙한 누군가로 인해 겪은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를, 단지 매일 쌓여 있는 할 일들 앞에서 해이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상하려고 했다.


어쨌든 20대 초반까지는 그런 식으로 여러 번의 작은 위기를 견뎠다.


그러나 결국 우울증에 걸린 시기는 마치 딛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깜깜한 숲 속으로 곤두박질친 것 같은 순간이었는데, 가지를 부러트린 게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더 이상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게 어렵게 되어 버린 무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지가 부러지는 순간 내 곁에서 냉큼 비켜섰다. 떨어지는 나를 목격한 소수의 친구들은 괜찮냐고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 부러진 가지를 디디고 있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무를 다시 기어오를 힘으로 스스로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온몸에서 피가 마르고 눈알이며 내장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알맹이 없이 비틀어진 내 가죽을 핀셋으로 집어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수조에 담그고 라벨을 붙였다. <아, 죽고 싶다>.


부러질 나뭇가지를 오르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알면 그걸 사랑할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은 삶을 뜻대로 조종하려는 강박이 삶에 대한 실망감과 증오심을 키운다고 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는 나 자신을 증오했다.


죽고 싶어 하는 나를 박제해서 방 한편에 세워둔 채, 마지못해 수업을 들으러 가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가끔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안을 받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래도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레종을, 단지 말보로 레드 같은 걸 달라고 하기는 부끄럽다는 이유로 가장 만만해 보였던 국산 담배를 사서 차가운 밤바람에 작은 불씨들을 실없이 날려 보내고, 또 어느 날은 새벽 4시 반에 운동화를 신고 주차장을 달리다가 적막 속에 너무나 크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감당할 수 없어 한껏 쪼그라든 채로 방으로 터벅터벅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면 죽고 싶은 내가 여전히 거기에 서 있었다.


삶은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마치 제비꽃이 제비꽃으로 자라고, 사자가 사자로 자라는 것에 비유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어떤 제비꽃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 가령 연이은 장마로 뿌리가 썩거나 누군가가 와서 꺾어가는 일 따위를 모두 예비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강박은 결국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 더 나아가서는 파괴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는 걸까?


그냥 한때까지 삶이 순탄했기 때문에, 생활력과 절제력이 좋은 나라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제법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귀납적인 판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영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삶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상실하고 나서야 그 사랑이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거짓 사랑을 들추어서 쫓아내고 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죽을 이유도 용기도 없었던 탓에, 그렇게 일상에 대한 애착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마다 못생긴 갯벌 같은 마음을 거닐며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조개껍질들을 하나 둘 주워 모았고, 결국 언젠가 이런 글을 쓰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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