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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13. 2023

나도 방이 갖고 싶어졌다.

두 집 살림의 서막


스물여섯.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비혼주의에 가까웠던 내가 어쩌다 결혼을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너무 사랑해서라기 보다는...(사랑은 어차피 금방 식어...) 남편같이 좋은 사람을 놓치기 싫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세상 진지한 남자. 한편으론 나를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며 편지에 고백하는 귀여운 남자. 그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몸과 마음이 아팠던 내 옆을 지켜준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믿음을 준 남자였다. 존경할 수 있는 면모를 갖추되 나를 아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와 결혼한 이듬해. 첫 아이를 안았다. 15개월까지 모유를 먹이던 중 둘째가 생겼고,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둘째도 15개월간 모유를 먹였다. 몸매 같은 건 개의치 않았다. 출산 전, 남편이 지인으로부터 받은 한 권의 자연주의 육아서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들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가장 좋은 음식이 모유라고 설명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비실했던 게 여섯째로 태어나 모유 대신 분유를 먹고 자라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두 딸에게만큼은 모유를 먹이고 싶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돌을 지나 걸어 다닐 때까지 잔병치레 없이 잘 커주었다. 분유값을 아끼거나 젖병소독 같은 자잘한 일거리를 더는 건 덤이었다. 두 가지만 빼면 여러 면에서 완벽했다. 아이들의 수유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과 반드시 아이들을 옆에서 재워야 한다는 것. 아이들과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으니 1년 내내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아기 때부터 옆에서 꼭 붙어 자던 딸아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따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안방에서 수면 독립을 하고 난 후부터는 남편과 함께 안방을 썼다. 아이들은 옆에 없지만 깊은 잠을 자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소리나 불빛에 예민한 기질 때문이다.


남편은 밤 12시를 넘겨 집에 들어오거나 새벽같이 나가는 날이 많은 바쁜 사람이다.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도어록 비번을 누르면 바로 잠에서 깨버리는 건 물론이고 양치질을 하거나 변기 레버라도 내리면 긴 시간을 뒤척여야 했다.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안 골던 코까지 곯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는 옆에서 잠들기가 더 어려워졌다.


결국 우리 부부는 본의 아니게 따로 자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이 안방에서 잠들면 내가 거실에서 자고, 남편이 거실에서 자면 내가 안방에 들어와 자는 식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서먹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나의 수면 건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가끔은 안방에서 같이 자다가 남편이 코를 골기 시작하면 그제야 마루로 나와 잠을 청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에게도 각자의 공간은 늘 필요했다. 남편은 퇴근 후 안방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고, 혼자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로 스포츠 경기 보는 걸 즐긴다. 나는 베란다에 둔 개인 책상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딱히 뭘 하지 않더라도 그저 작게나마 내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진짜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늘 꿈틀거렸다.


이 집에 이사온 후 베란다 한 쪽에 책상과 책장을 두고 사용했다.


이 책상에서 석사학위 논문도 쓰고, 보고싶은 영상을 보며 혼자 야식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베란다에서 읽은 '자기만의 방'은 이런 나의 열망에 연료를 들이부은 책이었다.


언제나 저녁식사를 준비했고 접시와 컵들을 닦았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사회에 나갔습니다. 그 모든 일에서 남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사라져 버렸지요. 어떠한 전기나 역사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날짜와 계절을 정확히 꼬집어서 1868년 4월 5일과 1875년 11월 2일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그녀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 역시 누군가 2006년 4월 28일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아마 두 아이의 밥과 간식을 여러 번 차리거나 치웠을 테고, 어질러진 장난감과 책들을 정리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의 이러한 삶을 '기록되지 않은 삶의 축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여성의 역사는(나의 역사 또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녀는 '글을 쓰려는 여성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을까요? 콧잔등에 분을 바르고 있었을까요? 상점 유리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요? 몬테카를로에서 일광욕을 하며 으스대고 있었을까요?


질문의 형태를 띤 문장들 안에는 글쓰기의 열망을 지닌 여성들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얼굴에 분이나 바르며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새로운 쇼핑과 여행을 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해선 안 된다고. 여성들이 전 지구의 인구를 낳고 길렀지만, 여성들의 역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울프는 재능을 지니고도 세상에 온전히 자기 글을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못한 채 절망과 고통, 분노 속에 스러져 간 여성들의 사례를 열거하며 말한다. 물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영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여성이 재산을 소유하게 된 이래 여성이 글을 쓰고 발표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재능이나 영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여성들이여,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부터 가져라.



버지니아 울프가 이렇게까지 물질의 힘을 강조한 것은 그녀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울프는 숙모가 남긴 연간 500파운드의 유산 덕분에 경제적 자유를 얻고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정적인 수입이 사람의 기질조차 바꾼다고 말할 만큼 돈이 창작의 몰입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했다.


가난은, 서양의 백인 남성들조차 위대한 시인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가난한 자의 영감과 재능은 돈이라는 현실세계의 벽에 가로막혀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없다고 말한 남성 문학 교수의 말을 빌린 것이다. 아서 퀼러 쿠치경이라는 그 문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을 낳는 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방에 대한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다."


울프는 그의 말을 통해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으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남성과 달리 여성은 늘 가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울프가 '기록되지 않으며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지적 자유를 누리기에 너무나도 가난한 여성들'의 처지를 연민하는 대신,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 단순히 창작을 위한 공간만을 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임과 의무와 근면과 성실로부터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 또한 자신을 만나는 행위다. 자기 안의 경험과 상상과 사유와 감정을 만나지 않고는 한 문장도 쓸 수 없으니까. 글을 쓰기 위한 자기만의 방이란, 결국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의미한 게 아닐까.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자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수 있고, 때로는 꺽꺽 소리 내 울 수 있고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분노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자기를 길러 준 제도와 관습과 문화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갖고 싶은 방은, 몇 년 후쯤 아이들 중 누군가 독립하여 어쩔 수 없이 남는 그런 방은 아니었다.




출처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은이), 이미애 (옮긴이), 민음사, 원제 : A Room of One's Own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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