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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16. 2023

‘주말엄마’로 지내도 괜찮을까?

너희들의 허락이 필요해


나는 언제 독립할지 모르는 아이들의 방을 호시탐탐 엿보는 소인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히 글만 쓰는 공간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글만 쓸 거라면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가는 쉬운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읽고, 쓰는 행위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그렇다고 공간을 얻는 일이 집을 뛰쳐나가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되었다. 가족들과 갈등을 겪거나 상처를 주는 건 결코 원하지 않았다. 평온한 가족관계가 유지되는 것. 그게 공간 독립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딸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제 너희들도 다 컸고, 내손을 필요로 하는 나이가 지났잖아.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살고 싶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면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고 가르쳐왔고, '어른이 된 너희들이 독립하지 않으면 엄마가 먼저 독립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지만 막상 그리 하겠다고 말을 꺼내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다 컸다지만 그래도 엄마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지 않을까. 표현은 안 해도 서운해하거나 원망하진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거 할 말은 다 해야겠기에 나머지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평일이나 주말에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면 어떨까 고민 중이야. 며칠씩 따로 지내도 식료품이나 생필품은 온라인으로 주문해 줄 거고, 혹시 따로 필요한 물건이나 배달음식 먹고 싶으면 연락하면 돼. 대신 내가 없는 동안 너희들이 직접 밥도 차려 먹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돌려야 해.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늘어나니까 불편할 수는 있을 거야. 그렇지만 너희도 언젠가 독립하면 직접 해야 할 일이니까 지금부터 연습한다 생각하고 하면 좋을 것 같아."


내 생각을 모두 말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주말 엄마'로 지내도 괜찮을까?"


두 딸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엄마가 원하면 그렇게 해. 우리는 별로 상관없어."


생각보다 담담한 두 아이의 말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도 내 옆에 꼭 붙어 자던 녀석들이 엄마의 삶을 응원해 줄 만큼 다 컸구나 싶어서.


두 딸 모두 씩씩하게 잘 컸다... 내가 잘 키운 건가...? ⓒEBS


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는 인생의 동료, 남편에게는 군더더기 설명 없이 '작업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편 역시 내가 오래전부터 독립적 공간을 꿈꾸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남편의 신경을 자극할만한 언어(자유, 독립, 해방...)는 쓰고 싶지 않았다. '작업실'이라는 말에 남편은 용도를 자세히 묻지 않았고 나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해 온 여러 작업들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손으로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개인 작업부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돈을 버는 작업, 주민들과 마을카페를 만들어 다양한 욕구와 관계망을 연결하는 작업까지. 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생산하고, 연결하는 여러 종류의 작업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박사과정 진학을 고려 중이었고, 지역 문화재단과의 계약으로 PM일도 하는 중이었기에 '작업실 겸 연구실'로 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늦거나 일이 많으면 작업실에서 (정기적으로)잘 수도 있어."


외박할 수도 있다는 내 말에 남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본인도 일이 많거나 너무 피곤하면 사무실이나 인근 모텔에서 자고 다음 날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고, 출퇴근이 힘들어서  몇 년간 회사 근처에 숙소를 구해 주말 부부로 지낸 경험도 있던 터였다. 우리는 업무로 인한 외박에 대해 서로 예민해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물론 아이들이 어릴 땐 그렇지 않았다. 남편의 늦은 귀가와 잦은 외박 때문에 힘들어서 눈물바람인 날이 많았으니까. 이제는 나도 밖에서 일을 하고, 나나 남편이나 누구 한 사람 집에 못 들어간다 해도 돌봐야 할 아이가 없으니 서로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공간을 얻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어떤 모양새로 만들어야 할지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그러다 자기 집을 주민들과 공유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뤘던 방송이 떠올랐다. 집주인은 혼자 사는 젊은 남성이었는데 2층짜리 집을 건축하고 보니 그 넓은 집을 혼자 사용하기가 아까웠단다. 실제로 티브이에 나온 집은 거실과 주방이 매우 넓은 근사한 단독주택이었다. 주인은 주로 2층을 쓰거나 외출을 하기 때문에 가끔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1층을 비워둔다고 했다. 셰어하우스 같은 공동주택이나 여행자와 공간을 공유하는 에어비앤비는 흔하지만, 자기 거주지를 손익계산 없이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 사례였다.


그땐 막연히 멋지다고만 생각했는데 공간을 만들어 그렇게 공유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여성들과 함께 읽고 쓰고 공부하고, 영감을 나누는 공간이 되어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9년간 운영해 왔던 마을카페가 재개발 철거로 사라진 후, 사적 공간이되 공적 기능을 함께 가진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가 맴돌던 차였다. 그러려면 '혼자 쓰기 아까운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인테리어 자료는 '**의 집'에서 참고했다. 워낙 인테리어 고수들이 많은 곳이라 온라인 집들이를 볼 때마다 눈이 팽팽 돌아갔는데 그중에서도 10평대 초반의 작은 집이나 집과 작업실을 결합한 '집업실' 디자인을 많이 참고했다.


여러 고민과 자료조사 끝에 만들고 싶은 공간의 기능과 콘셉트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개인적으로 글을 쓰고 공부를 하던 2평짜리 베란다의 기능을 이어서 할 수 있을 것. 

둘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관계망을 연결하는 공유 공간의 기능을 지닐 것. 

셋째, 여행지의 에어비앤비와 서재를 가진 북스테이 느낌이 날 것.

 



나는 본격적으로 검색 포털과 부동산 앱에서 매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작은 평수지만, 옵션이 있고 안전한 오피스텔이냐?

엘리베이터나 옵션은 없지만 조금 더 넓은 평수의 다세대 주택이냐?


오피스텔은 접근성도 좋고, 옵션 덕분에 초기 비용이 덜 들지만 임대료와 관리비가 부담이었다. 대부분 10평 이하인 오피스텔은 전망이랄 게 없고 공간이 작은 것도 단점이다. 더구나 오피스텔은 기본 옵션 때문에 북스테이나 에어비앤비 느낌으로 인테리어를 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다세대 주택이나 빌라는 비슷한 월세 규모의 오피스텔과 비교하면 넓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옵션이 없으니 처음에 사야 할 물건이 많고 오피스텔만큼 내부 환경이 쾌적하지 않다는 약점 때문에 망설여졌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 4층을 얻게 된다면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몇 주간 수백 개의 매물을 비교하면서 고민했다. 우리 도시에 나온 오피스텔과 다세대주택 매물은 거의 다 본 것 같았다. 나중에는 오피스텔 이름만 봐도 어느 동네에 있고, 어떤 가격대에 나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오피스텔은 편리하다는 것 외엔 그다지 내세울 개성이 없는 구조였다. 복층이냐, 아니냐. 수납이 얼마나 가능한가, 옵션 수준은 어떤가, 헬스장 같은 부대시설이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밖에 비교가 불가능했다. 대신 다세대주택이나 빌라는 베란다가 있거나 옥상 이용이 가능한 옥탑방, 벽면과 천장이 모두 나무인 집까지 좀 더 다양한 개성을 지닌 곳들이 많았다. 같은 월세 기준으로 면적도 오피스텔보다는 훨씬 넓었다.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다세대주택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엇보다 오피스텔에 매월 내야 하는 관리비가 아깝게 느껴졌다.


'매달 내는 관리비가 5만 원씩 1년이면, 300리터짜리 투도어 냉장고 한 대를 사고도 남을 돈이네!'

'관리비 낼 돈을 2년간 모으면 세 달치 월세가 굳겠는데?'


이런 계산들 때문에 오피스텔은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옵션이 없는 빈 공간을 채우려면 초기 물품 구입에 돈이 꽤 들겠지만 그건 나의 소유이니 나중에 이사 갈 때 가져가면 그만이고, 나중에 독립할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발품을 팔 시간. 예상한 보증금과 월세에 맞추어 다세대 주택과 빌라 매물을 보러 다녔다. 4층의 어떤 주택은 깨끗하게 도배와 싱크대 리모델링이 되어 있었지만 퀴퀴한 냄새가 났고, 2층에 자리한 빌라 역시 LED등에 도배, 장판이 깔끔했지만 창문을 열면 옆 빌라의 붉은 벽돌밖에 안 보이는 벽뷰였다. 공간도 넓고 전망도 괜찮은 데다 창고까지 갖춘 3층 빌라는 이삿짐 트럭이나 택배차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을 꼬불꼬불 올라가야만 했다. 다른 곳보다 월세는 저렴했지만, 이삿짐을 옆 골목에서 3층까지 들고 올라가야 하는 데다 앞으로 택배 주문도 편치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원룸이지만 넓어서 파티션만 두면 투룸처럼 쓸 수 있다던 방은 막상 가보니 세입자가 아예 청소를 안 하고 살아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온라인에서 많은 매물을 본 후 그중에 괜찮아 보이는 집으로 골라서 보러 다녔는데도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운명처럼 이 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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