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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08. 2020

이제 그림은 안 그립니다.

미대 입시까지 치른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유

떨리는 가슴으로 컴퓨터 화면 창에 이름과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어차피 안 될걸’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안 00. 불합격.     


그럼 그렇지. 서른 넘은 나이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미대 입시라니. 몇 번이나 이름을 입력해보았지만 ‘합격’이라는 단어는 뜨지 않았다. 학원도 안 다니고 혼자 집에서 두어 달 준비한 실력으로는 역시 안 되는 거였다.      


꼭 붙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대로 집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살림만 하다가는 나라는 존재가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 내 시간이 늘어나자 누군가의 엄마나 며느리가 아니라 내가 가진 재능과 열망으로 내 존재를 다시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졌다. 그때 떠오른 것이 ‘그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교내 미술대회를 겸한 수업 시간. 평소 오빠들과 월세방에서 자취생활하며 학교 준비물을 빠뜨리기 일쑤였던 나는 그날도 아무런 준비물 없이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짝꿍의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서 주시곤 채색 도구도 함께 쓰도록 하셨다. 주제는 미래 시대 상상해서 그려보기. 나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전쟁을 치르는 로봇과 아기를 돌보고 빗자루로 청소를 하는 로봇 등을 그렸다.


결과는 은상. 그림으로 받은 첫 상장이었다. 그 후 시골로 전학을 간 후에도 자주 그림으로 상을 받으면서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고향에는 미술학원이 없었다. 농협이나 은행에 취직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던 농촌지역이라 학원이라고는 초등학교 앞의 주산학원 하나가 전부였다. 엄마는 내가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주산학원을 보냈고 시골로 전학을 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는 방과 후 동아리로 미술부를 2년간 다녔는데, 미술을 전공할 선배나 친구는 모두 대구 같은 큰 도시로 나가서 학원을 다녔다. 나는 취미로 배우는 거였기도 했지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때문에 미술학원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 애니메이션 전공으로 4년제 대학이 생겼고, 입시를 치르려면 미술학원을 다녀야 했지만 가난한 시골 농부인 아버지에게 그런 요구를 하기는 힘들었다.      


‘그림’과 ‘미술학원’은 십 대에 해보지 못한 것을 삼십 대에 해보고 싶은 미련 같은 거였다.      




첫 입시를 실패한 이듬해, 지인이 운영하는 기획사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했다. 돈을 좀 더 벌게 되자 입시전문 학원을 다니면서 다시 입시를 준비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이 곳 저곳 찾아보다가 한 곳을 정해 8월에 등록을 했다. 오로지 입시 준비만 하는 학생들에 비해 한참 뒤늦은 준비였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일도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했으므로  이상 긴 시간을 투자하긴 무리였다. 우선 한 달치 수강료를 내고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나니 여유가 전혀 없을 만큼 일상이 바빠졌다.


일을 끝내고 오후 6시부터 하는 수업시간을 맞추는 것도 힘들었지만, 밤 10시까지 매일 4시간씩 하는 실기 준비도 체력적으로 힘겨웠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학원까지 오고 가는 시간도 힘들었고, 그 시간 동안 야간보육을 하는 아이들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시간과 체력적인 문제로 일을 그만두고 입시 준비에만 몰입하기로 했지만 일을 그만두자 당장 학원비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이번 달까지만 다니고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학원 옆 골목길에서 동갑내기 강사인 P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가끔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해줄 테니 언제든 연락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같은 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어린 친구들과 나의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씁쓸함 때문에 며칠간 울적했다.


며칠 후 강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시험 때까지 외상으로 학원을 다니고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두 명의 아이를 키우며 입시 준비를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연인 사이였던 P와 원장이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생은 가는 길목마다 선물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생각지 못한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약간의 부담을 가진 채 4개월간 학원을 다녔더랬다. 하지만 두 번째 본 1차 시험에서도 나는 탈락했다. 함께 시험을 본 학생들 중 세 명만이 1차에 합격할 정도로 탈락생이 많았으나 위로가 되진 못했다.      




너무 힘들게 입시 준비를 했기에 다음 해는 시험을 안 보려고 마음먹었다. 게다가 이젠 나이도 30대 중반. 주변 사람들이 입시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자꾸 물어보는 것도 창피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자 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가 싶었다. 세 번은 보고 포기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필기시험은 혼자 준비해도 되지만, 실기와 포트폴리오는 그래도 객관적으로 검증을 받으며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다시 학원에 등록했다. 기존의 학원비를 갚지 못한 상태여서 홍대 근처의 다른 학원에서 두 달을 준비했다. 역시나 매일같이 의정부에서 홍대를 오가며 하루 네 시간 동안 수업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시험 당일.

매년 파격적인 주제를 시험으로 내던 학교라 올 해는 어떤 문제가 주어질지에 대해선 강사들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몇 년 전에는 살아있는 닭을 풀어놓고 그리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라 3번째 보는 시험인데도 긴장이 되었다. 재료도 연필을 줄지 볼펜을 줄지 먹물을 줄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붙든 떨어지든 이젠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전보다 마음은 편했다.


시험 시작 시간이 되자 한 중년 남성이 하얀 석고상과 천을 들고 들어오더니 바닥에 큰 천을 깔았다. 그리고선 그 위에 석고상을 떨어뜨렸다. 석고상은 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재료는 연필 한 자루. 절대로 지워선 안 되며 실수조차도 작업의 과정으로 드러나게끔 표현하라는 것이 시험지에 적힌 주문 사항이었다.      


한국 입시미술에서 석고상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미술학원에서 석고상 그리기를 가르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시험을 볼 때만 해도 오랫동안 굳어져 온 관행 중 하나였다. 석고상 그리기를 통해 정확한 균형과 비례, 명암과 덩어리감, 밀도 같은 걸 가르치는데 대부분의 미대 입시에서 이런 표현력을 중심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대학의 미대에서 개개인이 가진 예술적 독창성보다는 내신과 수능점수, 이런 실기력을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진 석고상을 그리는 건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시험이었다.      


그 해에 1차 시험에 지원한 수험생의 수는 480여 명. 1차 시험에서 합격생의 3 배수를 뽑기 때문에 떨어지는 수험생의 숫자는 대략 360여 명 정도 되었다. 솔직히 2개월 준비하고 120명 안에 들 자신은 없었다. 다만 세 번 보고도 떨어지면, 할 만큼 했으니 욕심을 내려놓자고 다짐했기 때문에 시험을 치르는 내내 오히려 차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일주일 후 1차 합격자 발표일. 전 학원의 강사인 P가 연락을 해왔다. 가끔 안부를 전하며 지내던 터라 내가 이번에도 시험 본 걸 알고선 궁금해서 전화를 한 것이다.     


“합격자 확인해봤어요?”

“아뇨, 아직. 버스 타고 어디 가는 중이라서요.”

“그럼 내가 대신 알아봐 줄까요?”

“그래 줄 수 있어요?”

“수험번호 알려줘 봐요”     


좀 있다가 문자가 왔다.      


‘축하해요! 합격했어요!!’     


버스가 아니었으면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설사 120등 턱걸이로 붙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통과했으니까. 480명이 아니라 4천8백만 국민이 본 시험에서 120등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간에 도시락을 먹으며 8시간 동안 보는 2차 시험은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멍한 상태로 3시간쯤 보낸 것 같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재료로 주어진 나무젓가락과 고무줄, 종이, 점토로 뭔가를 만들었지만 내가 보아도 예술성이나 독창성이 부족한 작품이었다.      


2차 최종 결과는 탈락.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가벼웠다.    




얼마 후 내가 가려던 H대 근처의 술집에서 P와 만났다.      


“요즘 학교에서 나이 많은 학생들은 잘 받지 않는 분위기라고 해요. 교수들이 푸시하기 힘들다고. 제가 볼 때 안녕 씨는 혼자서도 충분히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에너지도 많고 말하고 싶은 주제가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학교 입학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작업해봐요.”     


당시 H대의 조형예술과 조교로 일하며 학과 분위기를 살펴본 그녀의 말이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몇 년 후 이사를 가며 생긴 약간의 목돈으로 밀린 학원비를 갚았을 때, 오히려 갚아줘서 고맙다던 그녀. 40대가 된 이후로 가끔 페북에서 소식을 보면 서로 건강하라고 당부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그렸던 작품들로 거리 전시를 한 적이 있다. 두 아이를 기르며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던 나는 그림마다 당시의 울분을 쏟아냈다.


육아와 살림으로 희미해진 정체성을 찾고자 들뜬 열망으로 시작했던 미대 입시. 나 자신을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투입했던 과정을 치르면서 결혼 내내 불안하고 동요하던 마음은 그제야 파문이 지나간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다행이었다. 실패할지도 모를 걸 알면서도 시도할 용기를 냈던 것.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해볼 걸’하는 후회에 휩싸였을 것이고, 세 번째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면 ‘한 번만 더 시험을 볼 걸’ 하는 미련이 남았을 테니까.      


돌이켜보니 내 안의 욕망은 창조적 예술혼보다는 누구의 엄마나 아내, 며느리가 아닌 나라는 독립적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림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던 거였다.


그 뒤로 저렴하게 장만한 넷북을 들고 카페를 돌아다니며 두서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하나의 이미지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내면의 수많은 풍경과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글이 가진 힘을 알게 된 후, 서서히 그림을 손에서 놓았다.   


입시가 실패로 돌아간 뒤 그렸던 그림들. 잠든 아이들 그리기와 재능낭비같아서 안하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캐릭터 그려주기.  


이제 그림은 아예 그리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저 가끔 전화통화를 하며 낙서 비슷한 걸 하거나 글을 쓰다가 떠오르는 이미지를 종이에 휘갈기는 정도다.


마을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을 거쳐 글쓰기에 정착한 지금 알게 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말이건, 그림이건, 글이건, 사진이건, 음악이건, 드러내는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기 안의 욕망과 불안을 표현할 도구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진 건 이제 글쓰기가 그 도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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