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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31. 2020

물려 줄  유산은 오직 이것 뿐

이십 대 중반, 의류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다 손이 고장 난 후. 나는 사교육 시장으로 발을 돌렸다. 열심히 공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공이었던 영어 과목으로. 콜라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똥물이라며 욕하던 선배들과 함께 데모하던 내가 제국주의 언어인 영어를 가르치다니. 하지만 그렇잖아도 약골인 체력에 계속 육체노동을 하다가는 버는 돈보다 치료비로 나가는 비용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이듬해 봄, 영어학원의 상담실장으로 취업한 나는 옷 먼지가 가득한 지하 의류공장이 아니라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깔끔한 학원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았다. 더 이상 손목이나 몸이 아플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고객은 아이가 아니라 학원비를 내는 부모'라고 버젓이 말하는 학원의 행태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학원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어전문 학습지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매주 한 번씩 아이들의 집에 들러 30분 동안 과제를 체크하고 수업을 했다. 일주일에 네 번은 아침마다 영어로 모닝콜을 하는 게 스트레스였지만, 시다를 할 때보다 노동 강도가 약했고 두 배 이상의 수입을 벌었다.    

 



6개월이 지나자 관리하는 학생의 수가 60명이 넘었다. 1분 30초 단위로 모닝콜을 쉬지 않고 해도 90분이 걸릴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아침 7시 전에 시작한 모닝콜은 8시 30분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겨우 1분도 안 되는 통화를 위해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전화기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Good morning!”

(잠이 덜 깬 목소리로)네... 안녕하세요.”

“Speak in English, please.”

“네?”

“영어로 말하라고.”

“아... Good morning.”

“Did you do your homework?”

“예?”

“숙제했냐고?”

“아, 했어요.”

“영어로 말해야지”

“Yes”

“그럴 땐, ‘Yes, I did’라고 말하면 돼.”

“아... Yes, I did.”

“OK. Open the page 36(thirty six).”

“예?”

“36쪽 펴보라고.”     


이런 어이없는 영어 통화를 60명과 하고 나면 아침부터 진이 빠졌다. 짧은 시간이나마 시작부터 끝까지 영어로 통화가 가능한 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인 H 뿐이었다.      


H의 집은 잘 살았다.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린 아파트를 그때 처음 보았다. 치과의사인 아빠와 미술관 큐레이터 엄마를 둔 H는 한 달에 100만 원에 가까운 학비가 들어가는 사립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씩 원어민 교사의 영어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H의 어머니는 학습지를 신청하며 상담교사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방문할 때 30분간 진행하는 수업을 모두 영어로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한 달에 3만 원이 조금 넘는 교재값으로 30분 내내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요구한 것은 무리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상담교사는 자기가 가르칠 것도 아니면서 젊은 영어전공 선생님을 연결해주겠다며 (대학시절 내내 공부도 안 하고 제적으로 졸업도 못한) 나를 그 집에 보냈다.      


처음 만난 H는 매우 차분하고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무리한 부탁을 한 H의 어머니도 기품 있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수업이 끝나면 아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곤 했고, 한 번은 간식을 먹고 가라며 나를 붙잡았다.      


“선생님, 라볶이 만들었으니까 드시고 가세요.”      


부담스러워서 먹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만들었다기에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지금도 라면 부는 건 못 참는다.) 기다란 원목 식탁 위에 갓 모양으로 된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넓은 주방. 파스타 라면 몰라도 라볶이를 후루룩 짭짭 먹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식탁 한쪽에 앉자 그녀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왔다.


접시 모양이나 세팅은 다르지만 대략 이런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라볶이였다.


사각형의 접시에 담긴 라볶이는 정갈했다. 라볶이 위에 올려진 통깨마저 의도된 큐레이팅 같았다. 아, 있는 사람들은 라볶이도 이렇게 먹는구나 싶었다. 라볶이를 다 먹었는지 남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살아왔던 환경과 너무 다른 그 집의 생김새와 그 날의 분위기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여름방학이 되자 H는 2주간 수업을 못할 거라고 말했다.      


“Why?”

“Uhm... because of vacation.”

“Wow. Where are you going on vacation?”

“Few countries in Europe.”     


그 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H에게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더니 베네치아라고 말했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개강날. 커다란 해바라기가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긴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강의실로 들어왔던 과 동기 P. 짧은 커트 머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P는 양팔을 앞으로 뻗어 손을 힘차게 흔들며 우리에게 "Hi를 외쳤다. 그리곤 방학 동안 이탈리아를 다녀왔다며 들뜬 목소리로 여행기를 풀어놓았다.      


“거긴 베네통이 진짜 싸. 이 원피스도 베네통 거야.”     


H가 베네치아라고 말하는 순간, 기억 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P의 그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카푸치노'를 참 많이 마셨다. '이탈리아는 못가도 이탈리아식 커피는 마실 수 있잖아.' 하는 무의식이 선택한 메뉴였지 싶다. (작년, 목포 가비 1935에서 마신 카푸치노)

    



지난번 H를 연결해준 상담교사가 이번엔 세 명의 남매를 한꺼번에 연결해주었다.


“아이가 셋인데 다 같이 배우고 싶대요. 큰 애는 발레 하고, 둘째는 00 중학교 전교 1등. 막내는 초등학생인데 축구하고요.”      


아버지는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다.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이 집도 만만치 않겠군.


집을 방문하던 날. 주소를 보고 집을 찾아가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세 아이가 사는 집은 '00 클래식 아파트'라는 고급스러운 이름과 달리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짜리 아파트였다. 다행히 1층에 위치한 덕분에 계단을 오르내리지는 않아도 되었다. 현관문 옆의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어머, 어서 오세요. 선생님!”     


회색 철문이 열리더니 검은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비좁은 현관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어두웠고 거실 가득 들어 찬 온갖 짐과 가죽이 갈라진 검은색 소파 때문에 집이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잠시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본 깨진 바닥 타일까지. 짧은 시간임에도 관리가 안 되는 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손을 씻고 나온 후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깡마르고 큰 키에 피부가 하얗던 중학교 3학년 첫째, 작은 키에 안경을 낀 수수한 얼굴의 중학교 2학년 둘째.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배시시 웃던 초등학교 4학년 막내. 발레를 하는 첫째는 딱 보기에도 감수성이 예민해 보였고, 둘째는 성실히 공부할 타입이었으며, 셋째는 그냥 누나들 틈에 끼어 영어공부를 시작해보려는 분위기였다.  


그 집이 왜 그렇게 낡고 어수선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 달에 쓰는 사교육비가 얼마인지 상담교사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발레리나가 되려는 첫째는 교수로부터 받는 발레 교습만으로도 월 3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지출된다고 했다. 막내는 제주도 전지훈련이며 각종 훈련비로 나가는 비용이 상당했고,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둘째가 보습학원에 다니는 비용이 가장 저렴한 편이었다. 세 아이 교육비에 매달 들어가는 비용이 평균 500만 원(20년 전). 아무리 비행기 조종사 연봉이 높다 한들 그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며 다섯 식구가 먹고살려면 화장실 타일이 깨지고 소파 가죽이 뜯어져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화장기 없는 얼굴에 늘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던 그녀의 옷차림도 이해가 갔다. 발레를 하는 큰 아이와 축구를 하는 셋째의 스케줄들을 쫓아다니며 케어하느라 자신을 위한 시간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교육자이기도 했던 루비 페인(Ruby K. Payne) 박사는 자신의 저서 <계층이동의 사다리>에서 ‘계층 간에 보이지 않는 룰’을 제시한 바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사람이다.
어디에 돈을 쓰는가가 중요하다.
음식은 양이 넉넉해야 한다.
옷은 스타일과 개성의 표현이다.
현재가 중요하다.      


위의 내용은 어느 계층이 지닌 룰의 일부를 풀어쓴 것이다. '나랑 비슷한데?'라고 생각했다면 나처럼 (재산이라고는 사람 관계뿐이고, 모든 소비에 가성비를 따지는) 가난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빈곤층과 중산층, 부유층 중 빈곤층(Poverty)에 해당하는 룰이기 때문이다.



나의 소중한 재산 중 한 가지는 이렇게 만나서 함께 책을 읽고, 소박한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와 사람들이다.



브런치 유저 중 부유층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이를 중산층이 가진 룰과 비교해보면,


중산층이 생각하는 재산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집, 자동차, 보석, 가구...)이다. 그들에게 돈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며 음식의 핵심은 ‘맛과 질’이다. 옷에서 중요한 것은 ‘품질과 상표’이고, 현재를 중요시하는 빈곤층과 달리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래’를 중요시한다.

   

교육에 있어서는, 빈곤층이 교육을 추상적으로 대하는 것에 비해 중산층은 ‘교육이 성공과 돈으로 연결되는 핵심적 요소라고 (구체적이고 확고하게) 생각한다. 대리석 깔린 아파트에 살던 H의 어머니와 화장실 타일이 깨진 낡은 집에 살던 '00 클래식 아파트' 사모님은, 사는 모습은 달라도 이 지점에서 같은 부류였다.




몇 년 전 지인이 사춘기를 통과 중인 두 아이들과 2주간 이탈리아를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정말요? 어디가 제일 멋있었어요? 얘기 좀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아... 네"하고 말았었다.  "너무 좋았겠다" 정도의 호응은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참 쉽게 이탈리아 가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겨우 열두 살에 이미 이탈리아를 다녀온 H와 과동기 P가 무의식 중에 떠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쉽게 가는 걸 나는 왜 여태 한 번도 못 갔을까 하는 의문도. 그때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런 다짐을 했다.


'부러워하지 말자!'


하지만 부러 그런 다짐을 했다는 건. 부럽다는 뜻이었다. 해외여행을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 가족에 비해, 생존에 영향을 미칠만한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그런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그들의 삶이. 다짐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부러웠던 거다.


대학을 들어갔음에도 내 인생의 '미래'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적을 엉망으로 만들고 제적당한 채 대학을 나와버린 나와 학내 민주화 투쟁하다 역시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안정적인 고소득 직장과는 거리가 먼 노동운동 하는 남편. 우리 같은 부모를 만나 초등, 중등 시절 내내 학원이라고는 (둘째 아이의) 태권도 10개월이 전부인 두 딸. 우리 부부처럼 아이들 역시 지금껏 한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우리 가족이 여름휴가를 유럽으로 떠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과연 좋은 부모 인가 하는 하는 의문이 든다.


"산 입에 거미줄 안쳐, 걱정 마"라는 고리타분한 말로 아이들이 알아서 먹고 살길 찾아갈 거라 믿는 나는 무책임한 부모가 아닐까. 빈곤층이라는 계층 사다리에 갇혀 아이들에게 충분한 경험과 기회도 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부모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다른 엄마들이 아르바이트할 때, 나는 내가 원하는 공부 하겠다고 돈을 버는 흔치 않은 엄마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 삶을 올인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나'라는 개인의 욕구를 존중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고, 아이들이 나의 인정과 사랑에 매달리는 것을 경계했다. "엄마는 나 사랑해?"라고 아이들이 물을 때면, "응, 사랑하지. 그런데 엄마는 엄마를 제일 사랑해. 그다음이 너희들이고. 그러니까 너희도 너희 스스로를 가장 사랑해야 돼."라고 대답했다.


원체 다른 사람 비위도 못 맞추고, 속에 없는 말은 못 하는 편이라 칭찬에도 인색했다. "우리 딸 천재 아냐? 잘 그렸어! 세상에서 최고~" 이런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양육서에 나오는 대로 노력한 과정을 칭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늘 나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고 말했다.(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을 못한다.) 이런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노후 준비도 안 된 주제에 지금부터 재테크를 한다한들 아파트나 통장, 주식, 골드바같은 걸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실천해온 삶의 태도뿐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공부할 것.


타인의 인정과 사랑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건강한 자기애를 지닐 것.


그리고 이웃들과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실천할 것.


모두 일상에서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오늘도 읽고 쓰는 이유이고, 딸들이 등 뒤로 지나갈 때 황급히 드라마 유튜브 영상을 내리는 이유다. 아이들은 내 등을 보고 자라니까.(이런 생각하면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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