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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16. 2020

얼굴에 책임을 진다는 것

1996년, 한적한 지하철 역.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저기요, 잠시만요.”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멀끔한 셔츠와 바지 차림의 남자였다. 그 옆에는 머리를 단정히 묶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이 서 있었다.      


“네?”

“얼굴에 복이 참 많으세요.”     


쌍꺼풀 없는 눈에 자주 미간을 찌푸려서 인상이 차가워 보인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복이 많은 얼굴이라는 평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펭수야말로 복덩어리 얼굴의 최고봉인 듯. ⒸEBS


“복을 많이 갖고 태어나셨는데... 그걸 조상님들이 막고 계시네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움찔 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 혹시 조상님 때문이었나? 그 후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던 나의 불행도?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 내 모습을 본 그들은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가까이에 저희 사무실이 있어요. 멀지 않으니까 잠깐만 가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낯선 이들을 따라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간다는 게 영 꺼림칙했지만 그들은 이미 내 손목을 잡고 길을 안내하는 중이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들을 순순히 따라간 건 궁금함 때문이었다. 과연 내 인생은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조상님들이 막았다는 그 복을 제대로 받기만 한다면 앞으로 탄탄대로를 걷게 될까. 대체 어떻게 해야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걸까.      


사무실은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건물 외관도 멀쩡했고, 2층에 자리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고 환한 거실이 나타났다. 거실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으니 남자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남자가 말했다. 이건 우주예요. 그리곤 동그라미에 선을 몇 개 더 긋더니 한자를 곁들여가며 설명했다.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 ‘개벽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이런 의미였다. 어떻게 해야 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걸까? 나는 질문 대신 그들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야 돼요.”     


뭐라고? 김이 빠졌다. 겨우 ‘제사’라니. 새로운 세상과 제사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지금 돈 가진 것 있어요?”

“돈이요? 별로 없는데...”

“괜찮아요. 있는 만큼만 음식 준비해서 지내면 돼요.”     


차마 못 지내겠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가방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냈다.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라고는 달랑 오천 원짜리 한 장뿐.        


“오천 원밖에 없는데요.”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남자는 곧 괜찮다고 했다. 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자 여자가 돈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다른 여자가 오더니 제사 지낼 때는 한복을 입어야 한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여자의 안내로 들어간 작은 방에서 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입노라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갑자기 박차고 나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방으로 주뼛주뼛 들어갔다. 기다란 위에는 커다란 초가 타고 있고 내가 낸 5천 원으로 사 온듯한 인절미 한 팩이 놓여 있었다.      


“절하는 순서를 알려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미 한복도 입었고 돈도 냈는데. 운을 틔울 수만 있다면 그깟 절 몇 번쯤이야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운데에서 두 번 절 하세요.”     


두 손을 모으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오른쪽으로 두 걸음 가서 다시 두 번 절 하세요.”     


다시 오른쪽으로 가서 두 번 절을 했다. 그다음엔 왼쪽, 다시 오른쪽. 그렇게 시작된 절 릴레이.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시키는 대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경련이 난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절은 온몸에 땀이 흐르고 옷이 축축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방을 나와 한복을 벗을 때쯤엔 얼굴 화장까지 모두 지워진 다음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했는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다. 부스럭거리는 한복을 입고 땀을 흘려가며 절을 하는 동안, 나는 어떤 오류에도 빠져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는커녕 절을 하면 할수록 제발 조상님들이 내 복을 가로막지 말아주었으면하는 염원만 강해졌다.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던 그들의 말에 내 마음이 흔들렸던 건 그 말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위안이 되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성찰과 노력 대신 막연한 바람만으로 삶이 바뀌길 바라는 행위가 얼마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5천 원짜리 제사상에 절을 하고 난지 2년 후. 그사이 조상님이 가로막았다던 복이 내게 왔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하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더 삐딱해진 나는 낯선 사람이 “얼굴에 참...” 까지만 말해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하루는 지하철을 타려고 플랫폼에 서 있는데 지나가던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왔다. 기다란 치마 형태의 먹색 개량 한복을 입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여자였다. 그녀는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얼굴에 복이 참 많으시네요.”     


또, 또...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마디를 덧붙였다.

    

“관상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들한테 많이 베풀고 사세요. 그러면 복 받으실 거예요.”     


그리고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이 유유히 사라졌다. 이번엔 뭔가 좀 달랐다. 어째 빈말 같지가 않았다. 최소한 그녀는 실체도 없는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그녀의 말에는 진정성이 묻어났다.


철이 들어서인지 그녀의 말 때문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는 극도의 개인주의에서 약간 방향을 어 좀 더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운명은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했다.


‘내가 아직 덜 베풀어서 그런 가봐.


거꾸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베풀어서 그런 건가?’     


따지고 보면 그건 얼굴에 복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베푸는 행위로 인해 나타난 영향과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원인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면 결과 역시 선하고 좋은 것으로 나타날 확률이 높으니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얼굴에 아무리 복이 많아 보인들 나쁜 짓만 골라한다면 복이 제 발로 들어올까.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Everty man over forty is reponsible for his face)
_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내 나이 마흔넷. 링컨의 말대로라면 복을 타고 난 얼굴이라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복된 얼굴을 만들어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마흔 중반이 된 내 얼굴은 이제 복이 참 많아 보인다던 20대처럼 하얗지도 않거니와 젖살도 빠지고 낯빛도 어두워졌다. 미간에 희미한 11자 주름이 생겼고, 입가에도 팔자주름이 선명해졌다. 한동안 그 주름들이 신경 쓰여 부러 고영양 크림을 바르고 손으로 펴보기도 했지만, 한 번 패인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또한 내가 표정으로 지은 얼굴의 역사이니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러한 얼굴에 대한 링컨의 성찰과 우리가 막연히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온 '관상'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캐나다 토론토대학(University of Toronto) 심리학과 연구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부생 81명을 대상으로 18~35세 사이 백인 남성 80명과 백인 여성 80명의 흑백 사진을 보여준 후 이들의 '계급'을 추측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어떤 문신이나 피어싱도 하지 않았으며, 무표정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이중 절반은 1년에 15만 달러(한화 약 1억 6천만 원) 이상을 버는 상류층이었으며, 나머지는 연 수입 3만 5천 달러(한화 약 3천7백만 원) 이하인 노동계급이었다. 모두 무표정한 모습의 '얼굴'로만 추측하게 했는데, 실험 참가자들의 68%가 사진 속 인물들의 계급을 맞췄다. 무작위 확률보다 상당히 높은 결과라고 한다.


연구진은 얼굴의 특정 부위보다는 얼굴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가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긍정적인 표정이 상류층임을 암시하는 강력한 단서라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니콜라스 룰(Nicholas O. Rule) 심리학 교수는 얼굴에 대한 실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얼굴은 세월의 경험을 반영하고 드러낸다. 우리가 표정을 짓지 않아도 얼굴에는 우리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평소에 어떤 감정을 주로 느끼며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아왔는지가 얼굴에 드러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실험에서 맞출 수 없었던 나머지 32%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부자지만 우울한 인상인 이들과 가난하지만 씩씩하고 긍정적인 표정을 나타내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내가 부자처럼 보이는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어차피 1년에 3천7백만 원을 버는 미국의 노동 계급보다도 수입이 적으니까) 다만 피곤에 찌들거나 불만이 가득해 보이기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일은 주름 개선 크림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남겨질 삶의 흔적을 잘 가꾸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인상 쓰지 말고 자신과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자.

좋은 일 많이 하고, 베풀며 살자.

조상님께 복 달라며 떼쓰지 말자.

팔자 주름 신경 쓰지 말고 자주 웃자.

내 얼굴은 내가 책임지자.


최선을 다해 자주 웃어도 펭수만큼 복 많은 얼굴은 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웃자. ⒸEBS



출처 원문(영어) : Most people can tell if you’re rich just by looking at your face



*이틀 전 심하게 넘어지면서 오른팔에 골절상을 입고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6주간 깁스를 해야 한다고 해요ㅜㅜ. 작가의 서랍에 있던 이 글은 왼손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수정하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기존에 써두었던 글을 수정하거나 짧은 글을 쓰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완전히 오른손을 못쓰게 되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빨리 두 손으로 글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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