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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8. 2020

우울증과 이렇게 헤어졌습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21년 전 가을, B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진료실. 무테안경을 낀 수더분한 인상의 의사가 물었다.     

  

“정말 입원하고 싶으세요?”

“네.”

“정신과 병동에는 자리가 없는데...”


제 스스로 입원시켜달라고 말하는 정신과 환자가 얼마나 될까.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아주 미치지는 않았다는 걸 알았기에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나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입원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외래진료를 받았던 의사에게 정신과 병동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아무 병실에라도 넣어달라고 졸랐다. 늘 안녕 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던 의사가 정말로 입원을 원하느냐고 한 번 더 물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대학교 선배를 보호자로 대동하고 입원 수속을 마쳤다.

   

배정받은 병실은 아직 환자가 없는 산부인과 병동  2인실이었다. 환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하얀 침대 시트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나는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의 발작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 손목에 흉터를 남기고 온 터였지만, 입원과 동시에 마음껏 환자 역할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왜 주변 사람들은 지금껏 내버려 둔 거죠? 정말 나쁜 사람들이군요. 이제 마음껏 아파하세요. 우리가 돌봐드릴게요.”


의사가 나 대신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입원 허가는 그동안 내 고통을 유발하고 몰라준 사람들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환자가 된 나를 보고 그들이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입원 후에도 나의 심리상태는 불안했다. 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링거줄을 멋대로 뽑아버려서 팔뚝에 흐르는 피로 침대 시트와 환자복에 피칠갑을 해서 간호사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물건들을 집어던지거나 남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안 피우던 담배를 뻑뻑 피우기도 했다.  


거로 가끔 수액을 맞고 약을 먹는 것만 빼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웠다. 복도를 지나가는 환자나 간호사, 방문객들도 많았고 벤치가 있는 야외 옥상도 언제든 나갈 수 있었다.  주로 침대에 누워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입원한 지 일주일 후쯤부터는 가끔 병원에서 빌려주는 책을 보았다. 밥은 잘 먹지 않았다. 몇 술 뜨다 말거나 뚜껑도 제대로 열지 않은 적도 더러 있었다. 50kg대였던 몸무게가 40kg대 초반으로 내려갔다.


병원생활은 지루하고 무료했다. 딱히 할 일도,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살 것도, 골라서 먹을 음식도, 입고 싶은 옷도 없는 공간. 시간은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갔다.        


병원 생활을 한 지 3주쯤 되었을 때, 병실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제왕절개 수술을 한 산모였다. 병실은 때때로 음료수며 꽃다발을 들고 와 산모에게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그럴 때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거나, 아예 병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문을 열고 닫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주고받는 말소리. 모든 소음이 신경에 거슬렸다. 조용하고 독립적이던 병원 생활이 그들 때문에 침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적 안정과 휴식이 필요한 우울증 환자가 머무는 병실에 산모를 배정하다니. 먼저 입원한 나를 배려하지 않는 병원의 처사가 불쾌했다. 하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환자가 있고, 병실 침대가 비었는데 그걸 놀려두는 병원은 없을 테니까. 더구나 그 병동에 어울리지 않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녀야말로 아이도 낳지 않고, 찾아오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산부인과 병실에 머무는 내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머리를 풀어헤친 채 하루 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정신과 환자라니. 한 방을 쓰게 될 환자가 이런 사람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십 대 우울증 환자의 눈치를 보느라 건강한 아기의 탄생을 마음껏 기뻐하며 떠들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병원에서 내가 풍기던 분위기는 이랬다.


서로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조용한 병실에서 편안히 머무를 수 없다면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산모가 입원한 다음 날, 곧바로 의사에게 퇴원을 요청했다.      


“이제 병원 밖에서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가 좀 생기셨나요?”

“네”  


정말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나마 환자로서 의사와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받은 덕분이었는지. 산모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던 것인지. 그들을 계속 병실에서 마주치기 싫어서였는지. 200만 원이 넘어가는 병원비의 압박 때문이었는지. 약물의 힘이었는지. 한 가지 이유로 단정 짓긴 어렵다. 그저 언제까지 병원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3주간의 현실도피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후 항우울제를 1~2년간 복용했다. 그사이 여러 강도의 우울증과 우울감이 거쳐 갔다. 심할 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방에만 쳐 박혀서 먹고, 자고 티브이만 보기도 하고, 자주 나의 상태를 배려해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원망했다. 똑같은 내일이 오는 게 싫어서 처방받은 한 달치 약을 한 번에 털어 넣기도 했다.


그땐,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그래야 사람들이 알 테니까. 내가 이렇게 아프고 힘들다는 걸. 나만 이런 상처를 겪는 게 억울했고, 그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잘못된 방법으로 전하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드러내지 않으면  고통을 그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이 내 고통을 알아?"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차라리 소리 내어 외쳤다면 나았을 텐데.


퇴원 후 오랫동안 관계의 부적응을 겪었다.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편입되길 노력했지만 어느 일자리에서도 6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택시회사 경리 1달, 의류공장 시다 3개월, 영어학원 6개월, 학습지 교사 6개월... 이런 식으로 불안정한 직장을 떠돌아다녔다. 학점을 엉망으로 만들고 졸업장도 없이 대학을 나와버릴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니 시인의 <발 없는 새>에서 '청춘은 다 고아'라던 말처럼 방황하던 몇 년. 그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결혼을 했다. 나 역시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한 불안한 청춘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비혼 주의에 아이도 낳고 싶지 않다던 평소의 말이 무색하게  "우리 결혼하자"라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내쪽이었다.


결혼 후에도 냉소와 우울을 오가며 남편과 갈등을 겪었고, 두 아이를 키웠다. 오랜 기간 겪은 우울의 끝에서 확인한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였다. 나는 두려웠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까 봐.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아프고 힘든 감정을 숨기고 참았다. 그냥 상처 받는 약자가 되길 택했다.      

내가 상처받는 이유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도 그들 때문이었다. 잘못은 언제나 타인에게 있었다. 그럴 때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 주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그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 외엔. 나는 두려움과 분노를 언어로 표현할 줄 몰랐다. 침묵하고 외면하는 굳은 얼굴로 냉랭함을 유지하는 것. 그게 분노를 표현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말했어야 했는데. 무엇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바보같이 참지 말고 터뜨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지진 않았을 테니까. 타인과 나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는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쓰진 않았을 거니까.       


아마도 많은 것들이 만성적인 냉소와 우울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타고난 예민하고 소심한 기질, 막내라는 가족 안에서의 위치, 작은 체구와 약한 체력, 일찍 돌아가신 무뚝뚝한 어머니와 사춘기에 만난 새어머니, 그로 인한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불신,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인정과 사랑에 대한 갈구,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배려하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쳐 온 문화와 관습. 무엇이 되었건 나는 오랫동안 자신을 부정적이고 우울한 인간으로 정의하고 살아왔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자 자유로운 인간은 우울감과 무력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결혼 후 6개월간의 상담과 3년간의 그림 작업, 10년간의 일기, 마을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서서히 깨우쳤다. ‘약자’라는 규정 뒤에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의존성’이 자리했다는 것도.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여전히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내면의 어린아이를 알아차린 것이다.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완벽주의가 칭찬받고 싶은 어린 시절의 그림자라는 것도. 사랑에 관심이 없던 게 아니라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음을.      




이제는 사랑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걸 안다.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애쓰던 시간 동안 내 안의 아이를 떠나보내고 우울과 이별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졌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누구도 에게 상처 줄  없다는 걸. 예전에는 약한 나 보호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는 걸.


나 자신을 '약자'가 아닌 '강자'로 정의하자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내면의 새로운 자아를 만난 것이다.


열심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를 변화시켜갈 에너지가 몸속에 차올랐다.



나만큼 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부모님도, 친구도, 남편도, 아이들도 나만큼은 나를 알지 못해.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남에게서 구할 수 있겠니?


외롭고 힘들어도 스스로 자신을 꽉 끌어안는 건 타인이 아닌 자신이어야 해. 다른 이에게 이해와 사랑을 의존하면 안 돼. 삶의 주인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길 의존하는 건 다르니까.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고,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떼쓰지 마. 넌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냐. 성숙한 어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가 받지 못한 이해와 사랑은 어떡하냐고? 너는 절대 어린 시절로,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어. 아직 살아계시다 해도 네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것처럼 부모님도 그 시절의 부모님이 아닐 거야. 과거에 붙잡혀 살면 네 나이가 몇이 되든 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나약한 어린아이로 살게 될 거야. 가 그토록 원하는 이해와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라는 걸 깨알아야 해.


상처는 만 가진 게 아니야. 그들의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투성이라는 걸 왜 모르니. 네가 그들의 상처를 모두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 역시 너의 상처를 모두 알 수는 없는 거야. 


내면의 어린아이와 이별하고, 스스로  잉태시킨 새로운 자아.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그제야 고단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상처 주었다고 믿었던 이들이 지녔을 상처에 대해서도. 이해라기보단 막연한 짐작과 추측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구나 제 각기 짊어진 삶의 무게로 고통받고 상처 입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를 우울과 자기 연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이제 ‘우울하다’는 말은 잘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울해’라고 말하는 순간, 더 우울해지니까. 경험상 그렇다. 대신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한다.


‘짜증 나’ ‘스트레스받아’ ‘화가 나’

‘힘들어’ ‘아파’ ‘도움이 필요해’


이렇게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만 있어도 최소한 속이 썩어 문드러질 이유가 없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물론 내면의 힘이 약할 땐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어렵다. 상대방의 반응이 두렵고, 혹시 생길지 모를 갈등에 대응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드러낸 상처와 감정이 상대방에게 수용되지 않고,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일을 겪고 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아프고 힘든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힘을 먼저 길러야 한다. 근육을 만드는 운동처럼 꾸준하게. 나의 경우, 실질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행위들이 도움이 되었다.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 말고, 아주 조금만 마음먹으면 쉽게 할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


걷기, 산 오르기, 햇빛과 바람 쐬기, 맛있는 음식 먹기, 위로가 되는 책 읽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노래 부르기...


그리고 상처를 수용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든든한 응원군 말이다. 나는 마을카페에서 하는 다양한 소모임을 통해 내 편을 많이 만났다. 인건비 못 받는 카페지기로 운영비 때문에 매달 스트레스를 받지만,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면 단연 이 사람들을 만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뿐이다. 거대한 에베레스트를 오르겠다는 다짐 대신 그냥 작은 언덕 하나를 오르겠다는 마음으로. 그래야 다음 언덕을 용기가 생기니까.


나는 그 자그마한 용기로 혼자 여행도 떠나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카페를 설립하고, 독학으로 대학도 졸업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다고 해외여행을 가본 것은 아니고, 마을카페가 대단히 잘 되는 것도 아닌 데다 스카이 학벌은 고사하고, 높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다. 원하는 만큼의 돈은 벌 수 없는데 대출은 늘어가고, 다 큰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손길은 필요하다. 손은 고장 나고 체력은 더 약해졌다. 운영이 늘 어려운 마을카페는 코로나 때문에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늘 일어난다. 항상 걱정거리는 넘쳐나지만 예전처럼 긴 우울감과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끼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우울과 냉소에서 벗어나니 삶이 훨씬 자유롭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로. 마을카페에서 "같이 책 읽어요", "글쓰기 할래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라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어쩌다 일정이 없는 주말에 남편이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산책이나 갈까?", "차 마시러 가자"며 손잡고 밖으로 나간다.


종종 바란다. 내 주변이 온통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과정에서 명상도 하고, 108배도 하고, 불교 경전도 읽어보고, 사주명리 공부도 해보았는데 한 편의 글 속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었어요. 우울하고 무력감을 느꼈다면서 어떻게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느냐고 궁금해하실 수도 있는데, 한 번에 한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이것저것 해본 거예요. 에너지가 넘쳐서 했다기보다 뭐라도 안 하면 더 무기력해지니까 한 것들도 있고요. 물론 그 사이 제가 원래는 호기심과 창조성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닌 구조적인 문제와 관습 등 우울과 무력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도 존재하고,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어려운 경우들도 많을 거예요. 제가 우울증을 앓게 된 이유도 여기에 쓰지는 못했어요. 여러 사람이 관련된 문제라서요. 각자가 우울증을 겪는 이유와 원인이 다르고 치료법도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혹시 저희 아이들이 나중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해주고 싶은 말들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마음이 많이 아플 땐 주변에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고, 약물의 도움도 필요하겠죠. 다만 저는 당사자가 해볼 수 있는 일들을 위주로 썼어요. 그런 한계가 있다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글이 많이 길어졌는데, 조금씩이나마 언급된 이야기들이 담긴 다른 글들의 링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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