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 쓰는 일이라면 질색하는 순도 100% 내향적 인간이다. 운동을 포함한 모든 육체적 활동을 싫어해서 자전거도 못 타고 운전도 할 줄 모른다. 워터파크에 가서 물놀이하는 것도 싫어하고, 당연히 수영도 못하고 헬스장 같은 건 다녀본 적도 없다.
학교에서 달리기를 해야 할 때면, ‘왜 달려야 하지? 달리라고 하면 달려야 하는 건가? 빠르게 달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지?’ 고민하며 꼴찌로 들어오던 학생.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면 공을 피하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그냥 아웃되는 아이. 1994년 오빠가 데려간 프로농구 결승전에서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응원할 때 꾸벅꾸벅 졸던 관객. 나는 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누군가 땀 흘리며 열심히 뛰는 일에도 심드렁했다.
타고난 체력도 좋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작고 마른 몸에 약골이었고, 배앓이나 두통, 감기 같은 자질구레한 질병을 달고 살았다. 내 체력이 왜 이 모양인가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키웠었거든요? 그 개가 어느 날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어요. 신기한 게 가장 먼저 태어난 놈이 덩치도 제일 좋고 건강하더라고요. 마지막에 태어난 놈은 어땠게요? 딱 봐도 ‘네가 마지막에 태어났구나’ 알만큼 비실비실하더라고요. 위의 형제들이 어미한테서 칼슘과 단백질을 이미 빼가서 그랬겠죠. 저도 그래요. 제가 여섯 형제 중 여섯째 막내거든요.”
그래서일까. 큰 힘 들이지 않고 혼자 조용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좋았다. 독서, 음악 듣기, 노래 부르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이 다섯 가지가 학창 시절부터 늘 적어내던 취미 군이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건 단연 ‘사색(feat. 망상)’이었다.
취미라기엔 애매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길 즐겼고, 이런 생각을 왜 하나 생각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지?' 이렇게 되새김질까지 하다 보니 늘 생각할 게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건, 이런 생각들에는 절대결론이라는 게 없다는 점이다.
에셔의 그림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생각의 순환에 빠져 살았던 나. _ 출처 https://mcescher.com/ <상대성> / M.C Escher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나타나는부작용들.
이게 보기에는 가만히 앉아서 별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아도, 나름 뇌가 계속 활동하는 거라 몸이 꽤 피곤하다. 더구나 내가 한 생각의 대부분은 실천이나 계획 같은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생각 그 자체이거나,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부정적 생각과 걱정, 불안, 자기 연민, 우울감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심했다.
생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잡념과 망상으로 푹 잠들지 못하고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조차 나는 생각했다. ‘왜 깊이 잠들 수 없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가족과 지인들이 “몸을 좀 움직여보면 어때?”라고 조언할 때면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건 내향적이고 예민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런 충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온몸을 뜨겁게 흐르는 피와 펄떡거리는 심장 대신 차가운 사색과 냉소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자였다.
'생각이 지병'이라던 심보선 시인의 말처럼,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오랫동안 집착했다. 생각하지 않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안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끄집어내는 일이라고 (또)생각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내면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과정에서 심리상담을 받았고,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털어냈으며 숨어 있던 의존성도 확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스피노자의 말 한마디를 만나게 되었다.
육체의 능동이 정신의 능동을 불러온다.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_출처 : <에티카 Ethica> 2부 23장_Spinoza, Baruch De
이상한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나보다 400년이나 빨리 태어난 스피노자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느낌이었다.(수백 년을 건너뛰는 스피노자의 아우라!) 당시 스피노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들어 본 유명한 서양철학자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화살처럼 심장으로 날아와 탁 하고 꽂혔다. 더 이상 정신과 내면에 머무르지 말고 육체를 움직이라고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서 함께 요가와 스트레칭을 함께 배우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평소라면 무조건 ‘노’를 외쳤을 텐데, 스피노자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라 어쩌면 이게 변화의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같이 할게요!”
한 겨울인 1월이었다. 배우는 내내 집에서 동작을 연습했다. 매일 1시간씩 온몸을 비틀고 찢고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촉촉해졌다. 몸에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었나?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초록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달리는 나를 발견했다. 걷는 것 외엔 몸의 움직임을 거부하던 내가 ‘의지에 따라 달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확인한 날이었다.
스피노자의 한 문장을 몸으로 체화한 후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일에 신경을 쏟았다. 무기력감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예전의 나라면 ‘왜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불안할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썼을 것이다.
지금은 일단 밖으로 나간다. 밖에서 햇빛과 바람을 쐬고, 산책이나 등산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서 불안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밤에 깊이 잠들 수 없던 이유도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 육체를 덜 움직여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잠이 안 오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면 자리에 누운 채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몸을 움직이고 나면 어느새 하품이 난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예전만큼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마시는 커피가 맛있는가? 이 사람과의 대화는 즐거운가? 감각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인지는 직접 가본 후에야 확인해볼 수 있으니까.
맛있는 디저트,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 이런 게 행복이 아니라면 뭐겠는가.
예전에는 행복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눈에는 보이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모양이 변하고, 몰려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흩어져 버렸다. 그때 내게 행복은 대단한 성취를 하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먼 미래의 것, 어쩌면 평생 가져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은 시시하리만큼 자주 행복을 느낀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행복하고, 매콤한 떡볶이를 먹으면 행복하다. 혼자 파란 하늘을 보며 걸어가는 것도 행복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책에서 멋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때 행복하다. 돈을 벌 수 있어서 행복하고,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행복이 ‘도처에 널려있는 흔한 것’이 되니 이것만큼 쉬운 게 또 없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느낄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 단순하고 감각적인 것. 너무 늦게 알아낸 게 억울할 지경이다. 그동안 행복인지도 모르고 놓친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한 편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