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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31. 2020

"여보, 나 요양 좀 다녀올게"


2월 말부터였다. 손이 고장 났다. 젓가락질하며 밥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양치질이 겁날 만큼 손목 통증이 심했다. 손과 함께 멀쩡하던 발목도 말썽을 부렸다. 겨울 양말을 두 켤레씩 신고 생활하는데도 찬바람에 맨발을 내놓은 것처럼 발이 춥고 시큰거렸다. 길거리에는 벚꽃이 피고 지는데 발목은 한겨울이었다. 서 있거나 걸어 다니는 게 전 같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발목 위에 몸을 대충 올려놓은 느낌이었다.      


미각도 둔해졌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어쩌다 만든 음식들은 하나같이 간이 안 맞았다. 아픈 손으로 반찬을 만들어놓으면 아이들은 자꾸만 짜다고 했다.      


냉장고에 먹을 건 떨어지고 집은 엉망이 되어가는 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손발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게 서러워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는데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 밥은 챙겨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안 가니 더 자주 밥상을 차렸다. 아픈 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을 꺼내고, 국을 데웠다. 병원과 한의원에서는 되도록 손을 쓰지 말라는데 집에 아이들과 있으면서 손을 안 쓰기란 불가능했다. 아이들에게 택배 물건을 들여오게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도록 시켜도 집에는 늘 할 일이 넘쳐났다.       


집에 있는 한, 손이 안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집을 나가야겠다. 어디로 가지? 혼자서는 숟가락 들고 밥 먹기도 힘든 주제에. 짐은 어떻게 들고 간단 말인가? 더구나 코로나로 하루가 멀다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이 시기에. 하지만 이 상태로 버티다간 몸과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여보, 나 요양 좀 다녀와야겠어. 한 일주일쯤. 손 안 써도 되는 곳에서 쉬고 싶어.”     


잠시 침묵하던 남편이 대답했다.     


“그래. 다녀와. 애들 걱정은 하지 말고. 어디로 가려고?”

“글쎄. 짐 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고. 그냥 한 곳에서 콕 처박혀 있을 만한 곳.”     


이 나이에 요양원을 갑자기 들어갈 수도 없고, 수술이 필요하거나 사고가 난게 아니니 병원을 들어가기도 어려운 상황. 어디에 숙소 하나를 정해 며칠 머무르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첫째,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가 많고 숙소 선택의 폭이 넓은 지역일 것.

둘째, 운전도 할 줄 모르고 놀러 다닐 게 아니므로 낯선 곳 대신 다녀본 지역일 것.

째, 기왕이면 풍경이 아름다운 곳.      


이렇게 제한을 두고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곳이 제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몸 상태로 제주는 무리였다. 아픈 손으로 버스에  캐리어를 싣고 공항까지 끌고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 행선지를 정하고도 숙소를 잡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사정을 들은 남편이 일요일 하루 시간을 내어 공항까지 픽업을 해주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날은 둘째가 공항 지하철이 연결된 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단다. 제주공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캐리어  이동 문제를 해결한 후 한적한 바닷가마을에 위치한 작은 게스트하우스의 1인실을 예약했다.  그리고 남편의 배웅을 받아 제주로 떠났다.      




제주공항은 한산했다. 코로나 관련 기사가 뜨면 덧글에 제주로 오지 말아 달라는 제주도민들의 부탁을 보았던 터라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나중에 확진이라도 되면 어떡하지? 사람들에게 민폐나 끼치고 싶진 않은데. 나중에 사람들이 알면 제주가 무슨 요양지도 아니고, 아프면 집에 쳐 박혀 있든 병원을 가지 왜 제주도로 여행을 오고 난리냐며 욕을 하지는 않을까.      


일단 몸에 열이 없기에 떠날 수 있었지만, 제주에 머무르는 일주일 내내가 가시방석이었다. 가는 곳마다  마스크를 끼고 수시로 손 소독을 하며 방역수칙을 지켰다. 밥을 먹을 때도 사람들이 몰릴만한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은 피하고 부러 작은 식당을 찾았다. 그럴 때 손님은 대부분 나 혼자 거나 둘셋 정도였다. 식당이든 카페든 음식을 먹고 나면 얼른 다시 마스크를 꼈다.  숙소에서는 홀에 나가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아 조식도 먹지 않았고, 일단 숙소에 들어오면 방에만 머물렀다.


      

숙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가야 하는 시간까지 주로 방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청소만 아니라면 밥 먹을 때 외에는 방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서 하루에 한 두 끼 정도만 챙겨 먹었는데도, 일주일이나 머무르다 보니 밥을 여러 번 사 먹어야 했다. 솔직히 제주에 내려오기 전 맛있는 제주 음식을 먹다 보면 몸과 마음이 좀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아무리 미각이 둔해졌어도 제주까지 내려와서 먹는 음식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불편한 손을 놀려가며 인근 맛집을 검색했다.


첫날은 분식집을 찾았다. 바다가 보이는 옥상을 배경으로 놓인 떡볶이와 한치 튀김, 맥주 사진을 인터넷  후기로 많이 보았던 가게였다. 한치 튀김은 혼자서 먹기엔 양이 많아서 떡볶이 1인분과 새우튀김 2마리를 시켰다. 옥상에는 한 커플이 막 음식을 다 먹어가던 참이었다. 나는 옥상 뒤쪽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다가 바닷가 쪽에 가까이 앉았던 커플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쟁반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떡볶이 하나를 포크로 콕 찍어 한 입 깨물었다. 첫 느낌은 뭐지?,였다. 치아까지 부실해진 건지 떡이 딱딱하고 질기게 느껴졌다. 새빨간 양념에서는 매운맛만 날뿐 달콤한 감칠맛이 나지 않았다. 튀김도 부스럭거리기만할 뿐, 특유의 고소한 맛이 없었다. 결국 그리 맛집은 아니었나 보다 하고 음식을 남긴 채 식당을 나섰다.       


둘째 날은 각종 구운 야채와 연근튀김을 곁들인 인도식 카레를 먹었다. 역시 이상했다. 카레 특유의 풍미는 나지 않고, 씁쓰레한 맛만 났다. 셋째 날은 고등어 구이가 나오는 성게 미역국과 성게비빔밥을 먹었으나 마찬가지로 쓴 맛이 강했다. 외국인 셰프가 만들어주는 수제버거도 싱겁기만 했다. 한 마디로 먹는 것마다 맛이 없었다. 모든 음식이 싱겁고, 쓰고, 밍밍했다. 확실했다.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는 내 혀가 문제였다.



먹는 것마다 맛이 없다니! 제주음식을 너무나 좋아하던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음식만이 아니었다. 몸이 아프니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시큰거리는 손목, 발목의 통증 때문에 바람을 피하느라 바닷가 근처는 가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봄일 텐데도 머플러로 목을 꽁꽁 싸매고, 여전히 양말을 두 켤레씩 신은채 고개를 숙이고 걸어 다녔다. 어차피 여행이 아니라 요양으로 온 거지만, 이럴 거면 굳이 제주까지 온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날도 밖에서 밥을 먹고 바닷바람을 피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말고는 인적이 드문 2차선 도로였다. 차도 건너편의 반대방향에서 천천히 보행 보조기를 밀며 걸어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희끗희끗한 짧은 커트 머리에 붉은색 티셔츠와 주황색 조끼를 입은 차림이라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보행 보조기를 세우고는 아이처럼 양 손과 다리를 이용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방지턱을 넘어 바닷가로 향했다.



나는 느리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바지를 걷고 바다로 들어가더니 허리를 숙인 채 바닷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을 채취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참 후에야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왜 알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그토록 오래 눈길이 갔을까.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저 나이쯤 되었을까.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커트머리를 해볼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던 것도 같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그녀의 모습에서 손발이 시원찮은 내 처지가 겹쳐 보였으니까. 지금은 아파도 통증을 참아가며 손을 쓰고 걸어 다니지만, 언젠가 나이가 들면 나도 저런 기구의 도움 없이는 걷기가 힘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언젠가 겪을 나의 미래 같았다. 


입맛만큼이나 씁쓸한 풍경이었다. 괜스레 아픈 몸을 끌고 와 내 처지를 투영한 마음이 쓴 것인지도 몰랐다.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할 때 알고 지내던 이들은 모두 운동권 선후배들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운동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두 아이를 낳고 집에서 살림하며 한창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었고, 미대 입시를 준비할 때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리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기다.


나는 새로운 경험이 생길 때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과 그렇지않은 이들을 구분하곤했다. 혼자 여행을 다녀본 이후로는 혼자 여행을 다녀본 사람과 안 다녀본 사람, 글을 쓰기 시작한 후에는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그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나누는 일이기도 했고,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따져보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에게 마음이 기운다. 아프고 난 후에는 자꾸만 아픈 사람들에게 관심이 간다. 제주에서 만난 그 할머니처럼.




아픈 몸으로 떠난 여행(요양)에서 몇 가지를 깨달았다.


다른 이에겐 따뜻한 계절이 누군가에겐 추운 계절일 수도 있다는 것. 같은 여행지의 풍경도 몸과 마음의 온도에 따라 달라보일 수 있다는 것.


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을 알아가길 바라지만 아픈 경험은 아무래도 달갑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가끔 삶에서 환자가 된다는 것. 덕분에 보이지 않던 이들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던 이들의 마음에 잠깐 머물러 본다는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


오늘도 누군가는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심장이 아프겠지. 우리 모두 지구별에 온 여행자라면 모두 다 가끔은 아픈 여행자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헤아려보아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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