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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08. 2020

넌 돈 천만 원도 없냐?

꼭 모으고 말 거예요, 천만 원

얼마 전 주말. 이른 아침이었다.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화면의 발신자는 둘째 오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오빠는 몇 마디의 안부를 전하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돈 좀 없냐? 천만 원.”     


오빠,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기 있기? 없기? ⒸEBS


응? 우리 부부에게 돈이 별로 없다는 건 온 가족이 다 아는 사실인데.      


“내가 천만 원이 어딨어?”

“넌 나이가 몇인데 돈 천만 원도 없냐!”     


오빠의 말투에는 ‘여태껏 천만 원도 못 모으고, 어쩜 그리 한심하게 사느냐?’는 책망이 묻어났다.


“그러게...

“알았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밑도 끝도 없이 돈이 필요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천만 원을 빌려달라던 오빠는 역정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돈이 꽤 급한 모양이었다.      


나보다 열여섯 살이 많은 둘째 오빠는 큰 오빠와 함께 대학 등록금을 내주고, 결혼할 때는 혼수용 가구를 모두 사주었을 정도로 막내인 내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었다. 천만 원이 있다면 빌려줄 게 아니라 그냥 주어도 될 만큼 오빠에게 받은 게 많다. 그런데 어쩌랴. 정말로 천만 원이 없는 걸.     


 

오빠, 내가 로또 맞으면 꼭...... Ⓒ아시아경제


며칠 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별생각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앞좌석 오른쪽에 앉은 청년의 휴대폰이 눈에 띄었다. 휴대폰 화면은 숫자로 가득했다. 뭐지? 나도 모르게 하얗게 빛나는 화면 속의 숫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은행 입출금 내역이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자잘한 출금 내역이 많은 걸로 보아 평소에 쓰는 자유입출금식 예금 같았다. ‘남의 통장 내역을 봐서 뭐 해?’ 이성은 그렇게 말하는데 어느새 눈은 통장잔고를 빠르게 세고 있었다. 일, 십, 백, 천, 만, 백만, 천.. 만...? 예금이나 적금도 아니고. 입출금식 통장에 천만 원이라니. "넌 나이가 몇인데 돈 천만 원도 없냐?"던 오빠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게... 우리(남편과 나)는 어쩌다 돈 천만 원도 없는 인생이 되었을까.

     

분명 과소비 때문은 아니다. 남편은 3대의 자동차가 바뀌는 동안 모두 중고로 헐값에 사거나 공짜로 지인에게 받아서 썼고, 작년에 폐차한 이후 차를 구매하지 않았다. 나 역시 명품백이나 비싼 화장품은 사본 적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해외여행도 한 번 안 가본 순수 국내파라 여행에 돈을 많이 쓴 것도 아니다. 작년에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수학 공부방을 다니기 시작한 것과 둘째가 태권도 학원 10개월을 다닌 걸 빼면 사교육에도 전혀 돈을 쓰지 않았다. 명절이나 생신이 아니면 시어머님께 매달 용돈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친정아버지도 7년 전 돌아가셨기 때문에 양가에 드리는 용돈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각종 공과금을 내고, 식료품비와 아이들 의복비, 교통비, 통신비 등을 내고 나면 잔고는 며칠도 못가 바닥이 났다.


대개 남편의 월급은 하루 이틀안에 모두 빠져나가거나 그마저 모자라서 이것저것 연체되기 일쑤였다. Ⓒ양영순 작가


남편이 외벌이로 버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으로는 카드값을 충당하기도 버거웠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여러 장의 카드로 카드 대금을 돌려 막거나 현금서비스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저축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당연히 재테크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둘 형편이 못 되었다. 아파트 관리비가 밀리고, 카드 값이 연체되는 데 재테크가 될 리가 있나.      


궁상스런 우리에게도 목돈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둘째를 출산한 후, 시할머니께서 적금 통장 하나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나중에 애들 대학 보낼 때 보태 써라.”     


헉. 1,2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몇 년쯤 지나자 이자가 붙어 좀 더 큰 목돈이 되었는데 대학은커녕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남편이 진보정당의 후보로 선거를 나가는 바람에 깨서 써버렸다.(아이고오...ㅜㅜ)

 

7년 전에는 지역에서 1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해왔던 남편이 일자리를 옮기면서 퇴직금을 받았다. 딱 천만 원쯤 되는 돈이었다. 나는 남편이 그 돈으로 여행도 좀 다니고 휴식을 취했으면 했다. 남들도 5년, 10년쯤 한 곳에서 일하면 안식월이나 안식년을 보내지 않나.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쪽잠 자는 일이 비일비재할 만큼 격무에 시달렸으니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의 피땀 눈물이 묻은 그 퇴직금을 마을카페 설립을 위한 출자금으로 고스란히 내놓았다.(그땐 좀 멋있었지...)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인 마을북카페 설립 당시 33명의 설립 출자자중 한 명이었던 남편과 나. 그래서 마을카페를 설립하는데 요긴하게 잘 쓰긴 했는데...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재의 신념과 이상에 충실하게 살아온 남편이나 나에겐 생활경제에 대한 개념과 계획이 부족(전무)했다. 시어머니께서 들어주 원금보장형 태아보험과 내 암보험마저 마을카페 운영이 적자에 시달릴 때마다 약관대출을 받아쓰다가 작년에 큰 아이 교정치료와 학원비 마련을 위해 깨고 말았다. 남들이 20년, 30년 후의 노후를 고민할 때. 우리는 “이번 달은 어떻게 버틸까?”를 걱정했다.      

   



한평생 저축의 경험도 없고, 태생적으로 숫자와 경영에도 약한 데다가 ‘카르페 디엠’을 신봉하던 나에게 ‘돈’은 언제나 삶에서 가장 먼 것이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부패의 원인이 무엇 때문인가. 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돈 때문 아닌가. 돈과 부자가 나쁜 것(고로, 가난한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내가 돈에 대해 갖고 있던 확고한 믿음 중 하나였다.     


그런 나의 믿음을 처음 ‘툭’하고 건드린 건 17년 전 만난 K언니였다.


K언니를 알게 된 건 처음으로 신혼생활을 하던 복도식 주공아파트에서였다. 옆집에 살던 K언니와 나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큰 아이는 한 살 차이가 났지만 둘째가 동갑이었고,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다. 먹고사는 형편도 비슷했고 한창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그렇듯, 펑퍼짐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대충 머리칼을 묶고 다니는 차림새도 비슷했다. 예민한 나와 달리 별것 아닌 일에도 허허 웃으며 털털한 K언니가 무척 편하고 좋았다.  


K언니와 내가 몇 달 간격으로 각자 둘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2005년. 몇몇 언니들과 우리 집에서 요가 모임을 시작했다. 결혼 전 나와 함께 옥탑방에 살았던 S언니가 요가 지도자 과정을 배운 후 공짜로 가르쳐준다길래 K언니까지 불러서 집에서 운동을 하고 함께 밥을 만들어 먹었다.


요가에 이어 글쓰기 모임까지 진행한 이듬해. 아는 엄마의 아는 엄마까지 멤버가 여럿으로 늘어났다. 모임을 주도하던 S언니가 방과 후 무료 공부방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우리 아이들만 잘 키울 게 아니라, 방과 후에 방치되는 아이들도 품에 안을 수 있도록 엄마들이 나서서 공부방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당시에는 지역아동센터라는 제도가 없었고, IMF 이후 경기가 악화되면서 방과 후에 학원을 가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방과 후 무료 공부방을 만드는 활동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K언니와 나를 비롯, 취지에 공감하는 아줌마 열 명이 감자탕 집에 모였다.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는 꼬맹이들을 둔 엄마들이었다. 한참 음식을 먹고, 아이들은 실내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적절한 타이밍에 S언니가 말문을 열었다.       


“공부방을 열려면 보증금이 최소한 천만 원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까?”    

 

이럴 때 가장 합리적인 건 아무래도 1/N이다. 그날 결론도 1인당 100만 원씩 돈을 마련하는 걸로 지어졌다. 단돈 10만 원도 없던 나는 마음속으로 ‘어떡하나’만 되풀이했지만.

       

다음 모임에서 S언니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했다. 좋은 소식은 아는 한의사를 통해 500만 원을 무이자로 빌리기로 했다는 것. 좋은 곳에 쓰고 싶어 하는 진보적인 성향의 한의사 단체라고 했다.


나쁜 소식은 겨우 천만 원으로는 적당한 넓이의 공간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보증금이 적으면 월세가 올라가는 법. 운영을 안정적으로 하려면 보증금이 많이 필요한데 천만 원은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그때 옆집 사는 K언니가 특유의 웃음이 섞인 말투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제가 2,500만 원 낼게요.”   

“네?”   


나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되물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19평 주공아파트의 전세금이 4,500만 원이었으니 2,500만 원은 실로 큰돈이었다. 똑같은 주공아파트에 살면서 나처럼 맨날 늘어난 헐렁한 티셔츠를 입던 언니가 250만 원도 아니고 2,500만 원을 내놓겠다니! 돈과 부자에 대한 편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언제 돌려받을지도 모를 큰돈을 이자도 없이 빌려주는 K언니의 배포도 놀라웠지만, 집에서 살림을 사는 평범한 30대의 기혼여성이 저렇게 큰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K언니는 얼마 후 정말 2,500만 원을 내놓았고, 우리는 돈을 더 보태어 보증금 3,500만 원짜리 공간을 마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K언니는 결혼 전 법무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산 1억 원짜리 오피스텔을  소유 중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출산과 양육으로 일을 쉬는 동안 보험으로 외벌이 하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형편이 어려워 오피스텔을 팔았단다. 때마침 공부방 이야기가 나왔고, 언니는 이런저런 빚을 갚고 필요한 비용을 뺀 나머지 2,500만 원을 공부방 보증금으로 보탠 것이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쁜 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돈의 주인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착하고 좋은 돈'도 있다는 걸.




그 후 '착하고 좋은 돈'의 주인을 몇 명 더 만났다.


주민들의 힘으로 함께 설립한 마을카페를 운영하던 3년 차였다. 적자 운영으로 차입금(시어머님이 들어주신 보험의 약관 대출)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참이었다. 함께 독서 모임을 하던 L선생님이 차입금의 이자가 7.9%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대출을 갚으라며 대뜸 500만 원을 출자하겠다고 하시는 거다. 


출자는 이자 없이 2년 이상 마을카페에 묻어두는 돈이다. 이자가 없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손해를 보는 셈인데 L선생님은 1 구좌에 5만 원인 출자를 한꺼번에 무려 100구좌나 출자하겠다는 것이다.


마을카페 나무의 독서모임이었던 <한잔의 낭독> 책거리에서 케잌뒤로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L선생님.



“들어놓은 펀드가 수익이 안나. 차라리 마을카페에 쓰이는 게 낫지.”   


그렇게 500만 원을 출자받아 금융 대출을 정리했다. 내가 놀란 건, 차용증도 없이 선뜻 큰돈을 맡긴 그녀의 용감함 뿐만이 아니었다. K언니 때도 그랬지만. 그냥 5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 돈을 내놓아도 당장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것도. 단돈 백만 원도 모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들이 '넘사벽'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펀드라니. 그런 건 돈 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아는 사람 중에 열심히 저축해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펀드와 같은 투자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 후 나무 카페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결코 부자는 아니었다. 평소 '나 돈 좀 있어.' 하는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와 비슷한 평범하고 소박한 서민들이었다.


작년. 마을활동가로 일하며 받은 알바비로 마을카페 한달치 월세를 내주고, 활동비없이 일해온 다른 운영위원들에게 똑같이 봉투에 돈을 담아 건네며 밥까지 사주던 J도 그중 한명이었다.


나도 돈을 좀 모아봐야겠어! 


이런 생각을 한 건 모두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가진 걸 조건 없이 내어주던 많은 이들  덕분에 돈이 가치 있게 쓰일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

-유대 격언-


그렇다. 돈에 끌려다니지 않으면서 유익한 종으로 부릴 수만 있다면! 돈의 쓰임새가 중요하지, 돈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까. 돈이야말 현실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의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결심했다. 천만 원을 모아보기로.


사실 작년부터 계획하고 준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몇 달간 디자인 작업과 강의가 끊기면서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둘째 오빠의 전화로 다시(빡!) 정신이 들었다.


천만 원을 모으는데 얼마나 걸릴지, 어떻게 쓰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3년간 동전으로 모은 22만원.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1,000만원 모으겠느냐마는. 부자들은 작은 돈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위로를 받았다.  


어느 브런치 작가님처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쓰게 될 수도 있고,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도 있고, 큰 아이 대학 등록금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고, 학수고대하던 20주년 결혼 기념 여행으로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쓰는 게 덜컥 겁이 나 예금으로 넣을 수도, 재테크에 도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시 제일 멋진 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스스럼없이 내어놓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자면 딸랑 천만 원만 있어서는 안 되고 좀 더 여유자금이 있어야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그녀들처럼 간지 나게 외치고 싶다.


“제가 낼게요, 천만 원!”   


꼭 모아볼 거예요, 천만 원. ⒸFOX

 



2006년 설립 이후 후원과 자원봉사로만 이루어지던 공부방은 추후 지역아동센터로 변환되어 보건복지부의 예산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운영비와 인건비를 충당하게 되었지만 매년 후원 찻집을 열어 10년 동안 K언니의 돈을 갚아나갔다.

K언니 입장에서는 10년간 받지 못한 이자와 물가상승률, 투자를 했을 경우에 비해 포기한 수익까지. 꽤나 많은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 번에 원금을 갚지 못하고 매년 쪼개서 소액으로 갚았으니 그 돈은 이런저런 생활비로 공중분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K언니 덕분에 공부방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 동네에 터를 잡고 39명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K언니를 비롯해 빌린 임대보증금을 갚느라 10년간 꼬박꼬박 열었던 후원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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