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사'의 미싱사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40~50대의 언니들이었다. 나같이 잡일을 하는 시다는 예순이 넘어 보이는 두 노인과 50대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전부였다. 신입이자 막내였던 나는 바느질을 하기 쉽도록 옷을 뒤집거나 미싱사들을 오가며 사이즈별로 옷들을 분류하고 나르는 일을 맡았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사이즈끼리 섞이면 미싱사 언니들에게 혼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다음 공정이 밀리지 않게끔 미싱사들의 속도에 보조도 잘 맞추어야 했다. 안 그럼 다음 미싱사가 할 일 없이 미싱을 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처음 몇 번 사이즈 실수를 한 것 외에 나는 평소 손재주라면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으로 맡은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냈다.
일한 지 두 달쯤 지나자 '진성사'의 미싱사 대빵인 황 대리 언니가 내게 큰 가위를 건넸다. 손잡이까지 쇠로 된 무거운 가위였다. 보통 시다는 작은 쪽가위를 가지고 실밥을 정리하는 일을 맡는데 큰 가위를 준다는 건 좀 더 어려운 일을 하라는 의미였다. 그 날부터 나는 목둘레를 재봉하는 미싱사 옆에서 몇 시간씩 바이어스를 가위로 자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무거운 가위를 들고 빠른 속도로 가위질을 계속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이상이 생겼다. 아침에 깰 때마다 오른손과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마비가 풀리면서 팔과 손을 쓸 수는 있었지만 숟가락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가를 내고 조퇴를 해가며 물리치료를 받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한의사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어떤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사람은 자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아픈 부위를 몸으로 누르게 된다, 아마 아픈 팔을 누르면서 잘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피가 안 통해서 마비가 오는 걸 거다, 라는 설명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세를 확인해보았다. 이럴 수가. 늘 똑바로 누워 자던 내가 모로 누워서 오른팔을 머리로 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잠에서 깨 보면 오른팔은 여지없이 옆구리나 머리에 눌려 있었다.
한의원에서 침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하루는 황 대리 언니가 쉬는 시간에 나를 불렀다.
“안녕아, 너 계속 열심히 하면 3년 안에 내가 미싱사로 키워줄게.”
자기 같은 A급 미싱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만두지 말고 계속 일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겨우 오십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으며 3년을 버티기엔 치러야 할 값이 너무 컸다. 결국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손이 이렇게 완전히 고장나버릴 줄은.
전조증상은 출산과 함께 찾아왔다. 첫 아이 출산 후 시큰거리던 손목이 둘째를 낳고 산후풍을 앓으면서 심해졌다. 경미한 통증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손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이유식도 만들어야 했고, 울면 안아줘야 하고, 매일 목욕도 시켜야 했으니까.
사는 게 힘들다고 푸념하느라 매일 손글씨로 일기를 쓸 때도 손이 아팠고, 택배 상자를 찾아오고 안 쓰는 가구를 버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손으로 몇 시간씩 마우스를 클릭하며 디자인 작업할 때도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매만졌고, 마을카페에서 커피머신에 무거운 포터 필터를 끼우고 뺄 때도 통증을 참아가며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던 집안일. 결혼생활 18년간 반찬을 꺼내고 넣느라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은 것만 해도 하루에 열 번씩이면 6만 5천 번. 아이 둘과 밥그릇, 국그릇, 반찬 두 개씩 하루 두 끼만 계산해도 설거지한 그릇이 최소 10만 5천 개(조리에 쓴 무거운 냄비와 프라이팬, 칼, 도마, 국자, 가위 다 뺀다 해도). 청소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만 돌렸어도 대략 930번이다. 그동안 내 손으로 내다 버린 4인 가족 쓰레기만 해도 몇 톤 트럭은 될 것이다.
게다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가구를 옮겼던 것, 북아트를 배우고 작업하면서 수없이 많은 종이를 칼로 재단하고 바느질한 것, 뒤늦은 미대 입시를 치르느라 하루에 네 시간씩 그림을 그렸던 것,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담고 싶은 마음에 무거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닌 것, 처음으로 대출을 받아 장만한 집과 마을카페의 셀프 인테리어까지. (마을카페 셀프 인테리어 이야기 => 17평 카페 인테리어, 어떻게 했냐고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 많은 무게, 많은 일을 감당해왔던 손이 드디어 경고를 보냈다.
마을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청소하는데 많은 손이 가는 커피머신.
일일이 손으로 종이와 가죽에 구멍을 뚫고 바느질을 해가며 꿰매던 북바인딩/ 미대입시 준비와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시절
올해 초. 처음엔 손에서 그릇을 몇 번 떨어뜨렸다. 칼로 사과를 깎는 일이 힘들어지더니 점차 음식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산더미만 하게 쌓이고 집안엔 머리카락과 먼지가 돌아다니는 데도 청소기를 돌릴 수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손가락이 아팠고, 책장을 넘기면 손목이 찌릿했다.
설 명절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설이 끝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지낸 시할머니 기일에 사달이 났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남편이 장손이다 보니 몇 해 전부터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당일 아침까지만 해도 이래저래 참을 만하던 손이 오후가 넘어가자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연료가 떨어져서 도로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늘 내 몫이었던 녹두 갈기는 둘째 딸아이가, 양파 다지기는 시어머니께서, 설거지는 큰 아이와 작은 어머니가 번갈아가며 하고, 제사가 끝난 후 가스레인지 청소와 그릇 뒷정리는 남편이 대신했다. 그동안 나는 구경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진성사'에서 일할 때처럼 숟가락조차 들기 어려워진 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으려면 손이 아프니 그냥 국에 말아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을 샀다. 쓰고 난 수저를 바로 씻지 못할 때는 배달음식에 딸려 오던 일회용 수저를 꺼내서 썼다.
전화가 오면 휴대폰을 들지 못해서 이어폰을 찾느라 허둥대기 일쑤고오는 전화를 놓치는 일도 많았다. 문자나 톡을 보내는 일도 힘들어졌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톡방에 의견을 남겨야 하거나 답장을 보내야 될 때면 아픈 손으로 글자를 쳐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손이 이럴 줄 모르고 마을카페와 협동조합에서 공모사업을 신청하기로 한 탓에 서류를 2건이나 작성하고, 작년 겨울에 결제해놓은 기관에서는 3월이 다 되어서야 데이터를 넘겨주는 바람에 아픈 손으로 통증을 참아가며 작업을 해야 했다.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도 손은 쉬이 낫지 않았다. 정형외과에서는 이미 오래된 통증이라 잘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미 힘줄이 많이 가늘어지고 약해졌다고. 주사요법을 쓸 수도 있지만 부작용이 있으니 당장은 권하지 않는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한의원에서는 증상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손을 쓰지 말라고 했다. 축구선수들이 은퇴를 할 즈음이면 무릎의 연골이 모두 닳는다더니 나 역시 수십 년에 걸쳐 쓸 손을 몰아서 써버린 모양이었다.
종종 아프긴 해도 나에게 손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라고 믿었을 땐 할 수 있는 것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디자인 일도 하고, 대학원 공부도 하고, 해외연수도 가고, 집안일도 하고, 마을카페 활동도 하고, 글도 쓰고, 여행도 다니고...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손은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먼저 집을 깨끗이 치우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설거지가 쌓이고 화장실이 더러워져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탁하고 내버려 두었다. 반찬은 사 먹거나 시켜먹고, 장보기는 인터넷을 이용했다. 디자인 일과 마을카페 활동은 코로나 사태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걱정을 덜었다. 대학원은 휴학을 할까 하다가 과목 수를 2과목으로 줄이고, 늘 수업을 들으며 하던 필기를 멈추었다.
손이 계속 이 상태라면 다음 학기에 써야 할 논문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배낭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혼자 여행을 가지도 못할 테고. 무거운 카메라는커녕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조차 멀리해야 한다. 가족이나 나 자신을 위해 맛있는 요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취미로 다시 그림을 그리지도, 배우다 만 우쿨렐레도 연주하지 못하겠지. 이렇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를 때면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이 퇴보하는 느낌이 들었다.
밀린 설거지를 하는 큰 아이와 배달이 일상화된 우리집의 밥상 풍경.
종종 묻는다. 이제 손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얼마나 남았을까?
아무리 아껴 써도 10%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그중에 최소한 5%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보는 데 소모될 것이다.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가벼운 법랑 컵을 쓰고는 있지만 어차피 손을 쓰는 건 매 한 가지니까.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 감고,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버스를 탈 때마다 카드를 찍고, 아침마다 안경을 닦고, 외출할 때 마스크를 끼는 일도. 모두 손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끔 베란다 문이나 전자레인지 문을 열 때 팔꿈치를 쓰고, 발을 이용해 물티슈로 욕실 바닥을 닦기도 하지만 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다. 인간은 두 개의 발을 포기하는 대신 손을 얻었고, 그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니까.
시할머니의 기일이 지난 지 얼마 후,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나오는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등과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 아파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이 정도 통증은 무대에 서는 사람한테는 숙명처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손을 쓰지 못해 울적해하던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사람들은 다 저마다 견디는 통증이 있구나.
그런데도 저렇게 참고 원하는 걸 해내는구나.
아파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아프더라도 해야 되는 거구나.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아프더라도 해야 되는 것, 그게 뭘까 하고.
그때, 방치해두었던 브런치가 떠올랐다. 2년 전 호기롭게 시작했건만 작년에 올린 글이 세편에 불과할 정도로 무심하게 버려두었던 브런치. 휴대폰에선 이미 브런치 앱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다. 노트북으로 '브런치'를 검색하고 주소를 클릭했다. 무려 7개월 만의 로그인이었다. 작가의 서랍을 눌러보니 미완으로 남은 두 편의 글이 담겨 있는 상태였다. 혹시나 하고 눌러본 통계의 일일 방문자수는 0과 2 사이. 월평균 조회수가 20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작가의 서랍에 담겨 있던 글 한 편을 읽어보았다. 분량은 적고 마무리도 부족했다.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수정이 불가능해 보였다. 완성도를 따지다가는 그냥 평생 작가의 서랍에서 썩을 판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냥 발행을 눌러버렸다. 어차피 볼 사람은 한 두 명일 테니까. 다시 브런치를 시작해보자는 출발 신호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그 후 노트북에 있는 예전의 글을 조금씩 수정하여 계속 업로드하고, 2년 전 브런치 초기에 썼던 글들은 모아서 브런치 북으로 발행했다. 그리고 새로운 글을 조금씩 써나갔다.
손에 이상을 느낀 3월부터 지금까지 발행한 글은 모두 34편. 평균 3.4일에 한 편 꼴로 글을 실었다. 다음 메인과 브런치 홈에 몇 번 노출되면서 월평균 조회수가 1,000배가량 늘었고, 열댓 명이던 구독자 수는 130명을 넘었다. 브런치를 찾아 주는 일일 방문자수는 꾸준히 200~300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브런치와 함께 한 4개월여의 시간 동안 대답은 분명해졌다. 내 손에 남은 나머지 5%의 에너지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느 날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안 지인이 물었다.
"손 아픈데 글은 어떻게 써요?"
"아픈데... 그냥 참고 써요. 손이 아프니까 오히려 분명 해지더라고요. 아픈데도 불구하고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브런치에 찾아와 글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통증을 참아가며 글을 쓰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