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터지고 대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몇몇 선배들이 총학생회실 구석의 소파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다. 아는 노래가 별로 없던 나는 조용히 앉아 선배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몇 곡이 끝나자 기타를 치던 인문대의 S선배가 옆자리의 낯선 남자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말간 얼굴에 부드러운 외꺼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다란 우산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비스듬히 선 그가 S선배에게 반주를 부탁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힘 있고 단단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나중에 선배들을 쫓아 집회와 수련회를 다니다 그가 다른 학교를 다니는 네 살 위의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본명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운동권 선배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별명이나 가명을 쓰곤 했다. 곰이나 말 같은 동물 이름으로 불리는 선배들도 더러 있었고, 경찰서에 잡혀가서 최수종이나 장동건 같은 말도 안 되는 가명을 대다가 맞은 선배도 있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다른 선배들의 이름과 달리 진짜 바다처럼 아득한 느낌을 주었고, 그의 내면 역시 깊고 넓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선배들의 이름 뒤에 '형'이라는 호칭을 덧붙여 부르던 때였으므로, 나를 비롯한 후배들은 그를 '바다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투쟁과 조직을 독려하는 투쟁국장이었다. 같은 학교가 아니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거리의 집회나 여러 학교가 모이는 일정이 있는 날이면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구불거리는 곱슬머리에 마른 몸매를 지닌 그를 멀리서도 알아보기 시작한 게. 진보 후보의 당선을 위해 선거 캠프에서 머무르는 동안 몸살로 앓아누운 나의 머리맡에 그가 감기약을 두고 간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거짓말을 한 아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하곤 했다.
하루는 학교를 방문한 그와 학생회관 앞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교정에는 깊은 밤이 내렸고, 주위는 고요했다. 우리는 별빛이 사라지고 새벽안개가 스미는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대화 끝에 그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말을 못 해서 마음이 답답해”
아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일 것 같았다.
(혹시... 나일까?)
“그 사람한테 솔직히 얘기해보세요”
그날, 선배는 우리 학교에서 잠을 청했다. 나는 이불도 없이 학생회실 소파에 누워 있는 그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긴 옷가지를 그의 몸에 덮어주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음 날 학교를 나서는 길에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타게 된 그와 나. 맨 앞좌석 창가 자리에 내가 앉고, 그는 옆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어색한데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잠은 오지 않고 가슴만 두근거렸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다면.
어디서 그런 용기 났는지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었다.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그렇게 잠시만, 기대어 있고 싶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내 머리 위에 포근히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목적지에 내렸다. 그가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강변역 테크노마트 9층 스카이라운지. 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꺼냈다.
“할 말이 있는데... 너한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너에 대한 내 감정이 남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 너를 다른 사람들처럼 대하질 못하겠어.”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선배들의 허락(?)을 얻어 연애를 시작했다.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평범한 연애는 아니었다. 집회가 끝날 즈음 쪽지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건네주거나 그가 우리 학교에 오는 날, 교정에서 시간을 쪼개 만나는 게 다인 시시한 연애였다.
대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전국의 모든 대학교들이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총여학생회장에 당선이 된 나는 학생회장들과 함께 학교에서 혈서를 쓰고, 단식을 했다.
서울 시내의 한 복판 어느 거리에서 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였고, 그는 집회를 준비한 다른 간부들과 함께 무대 앞쪽에 서 있었다. 햇볕은 내리 쬐이고, 지루한 연설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나는 “학생회장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자느라 앞의 말은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앞으로 나간 나는 그제야 집회의 마지막 순서가 혈서 쓰기라는 걸 알았다. 이미 3월에 있던 교내의 학생총회에서 한 번 혈서를 썼기 때문에 그날도 쓰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터였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커터칼을 받았다. 칼집도 없이 청테이프로만 한쪽을 감은 칼날은 얼핏 보기에도 무뎌 보였다. 나처럼 얼떨결에 영문도 모른 채 나온 학생회장들이 더러 있었는지, 우리는 “먼저 하세요”라고 양보하며 서로에게 칼날을 건넸다.
칼을 받아 든 나는 쭈뼛거리며 하얀 천 앞으로 걸어갔다. 햇빛에 반사된 새하얀 천을 보자 지난번 학교에서 혈서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름기가 반들반들하던 새 칼날이 손가락을 스치자마자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글씨를 쓰는 내내 손가락은 붉은 물감이 든 붓처럼 계속해서 피가 났다.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았는데도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또다시 칼날을 받고 보니 그날 베인 손가락의 통증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칼날을 잡은 손이 멈칫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자리에 앉아 학생회장들의 핏빛 결의를 기다리는 학우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계속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른손으로칼날을 꽉 움켜쥐었다. 왼손을 펴고 검지 끄트머리를 힘주어 그었다. 지난번과 같은 손가락이었다. 무딘 칼날 때문인지 핏방울이 좀처럼 맺히질 않았다. 좀 더 힘을 주어 그었던 자리를 다시 한번 더 베었다. 그제야 살짝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혈서를 쓸 만큼의 충분한 피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은 곳에 칼을 긋고 싶지는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른손으로 검지 손가락 끝을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혈서를 쓰는 내내 빨리 다른 사람들의 피로 글자가 완성되길 고대했다.
집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종이가 없었는지 신문지를 찢어 여백에 급하게 쓴 편지였다. 학교에 돌아와 그가 준 편지를 읽어보았다. '오늘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결의에 찬 너를 바라보며... '로 시작하여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로 갈무리되는 내용이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간 나의 행동을 '제가 먼저 나서서 혈서를 쓰겠습니다!'라는 결의에 찬 투쟁으로 해석한 그에게 차마 내가 졸다가 멋모르고 나간 거라는 말은 그 후에도 하지 못했다.
사회에 나오기 전까지 주로 투쟁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던 우리의 연애는 추석 명절에 함께 비디오방에서 ‘은행나무 침대’를 보는 첫 공식 데이트와 학생회관 앞 등나무 아래에서의 입맞춤을 거쳐 3년 후 결혼으로 이어졌다.
아련한 연애의 추억에 잠겨 글을 쓰다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 예전에 학생 운동할 때 이름이 ‘바다’였잖아. 그거 누가 지은 거야?(난 그 이름이 참 좋았다고)”
“누가 지어주긴. 내가 직접 지었지”
“강, 산, 바다 할 때 그런 바다였던 거지?(당연히 그렇겠지만)”
“아니. 원래 학교에서는 내가 느끼하다고 ‘빠다(Butter, 빠다코코넛의 그 빠다)’라고 불렸는데 그걸 ‘바다’로 바꾼 거야.”
뭐라고? 그 서정적이고 아련하던 이름이 ‘빠다’에서 느끼함을 한 스푼 뺀 것일 뿐이었단 말이야?
분명 이런 아련한 느낌이었다고...ㅠㅠ
그제야 아귀가 맞춰진다. 연애가 한창 무르익은 시절, 그가 전해주던 편지에는 투쟁국장답지 않은 표현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주머니에 너를 넣고 다니고 싶어'라거나 '섬섬옥수 같은 네 손가락'이 어쩌고 저쩌고, '너의 눈동자에는 별이 빛난다' 같은 문장들. 그때는 낯부끄러우면서도 나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사람들은 그에게 느끼함을 느꼈던 거다. (그냥 느끼한 거였어ㅜㅜ)
하지만 연애를 시작할 때 꼭 불러주고 싶다며 나를 교정 벤치에 앉혀놓고 김동률의 ‘기적’을 들려주던 그. 어제 전화를 걸어와 “당신은 나한테 찬란한 빛이고 희망이야”라던 남편. 나는 겨우 "갑자기 왜 그래? 당신 요즘 사는 게 힘들어?"라고 대꾸했을 뿐이지만, 알고 있다. 나의 '바다'는 로맨티시스트이자 찐 사랑꾼이라는 것을.
예전처럼 마른 뒷태를 볼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지나치치 못하고 사진을 찍는 이 남자. 그리고 이런 그의 뒷모습을 찍는 나.